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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강산 시인 / 시간을 굽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2.
이강산 시인 / 시간을 굽다

이강산 시인 / 시간을 굽다

 

 

속병 덕분에 방한칸 얻어 떠나와

맵고 짠 욕망과 인연은 그만 끓이겠다며 잠근 불판 위에 시계를 올려놓고

 

깜박 침묵의 이불에 눕다 깨어보니

두시 반이 아홉시 반으로 익어버렸다

 

낮이 까맣게 타버렸다

 

방 가득,

공복의 마음 가득

시간의 누룽지 냄새가 매캐하다

 

타다만 모퉁이 시간을 마저 굽고 긁어낸 누룽지가 지장암 석탑이다

백 년쯤 홀로 견딜 만하겠다

 

 


 

 

이강산 시인 / 꽃불

 

가을이라 꽃핀다고

한 송이 활짝 피어서야 꽃이겠는가

이제 막 벙그는 꽃대궁들이

바람에 흔들리다

낮은 키 못난 대로 서리맞을 때

저 혼자 살아서야 산 목숨이겠는가

우리 돌아가는 변두리의 밤

길가에 코스모스 산길에 망초꽃

꽃불 놓고

저렇게 무더기무더기 피어서 아름답지

우리 혼자 일어나

언제 힘깨나 쓴단 말 들었던가

허기진 날 많아도

하나 둘 스며들어 모여살 듯

한없이 약한 저 꽃들이

새벽 출근길의 시내버스 창가에

떼지어 서서

봄이나 가을이나

꽃 한 송이 잘 피어서 소용없다고

저 혼자 우뚝해야 볼품없다고


 

 

이강산 시인 /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다

 

 

골목의 그늘이 깊다

햇볕이 아직 남아 있다는 이야기다

늘 어두워야 돌아오는 사람들

가슴에 노을 한번 안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골목의 그늘이

어둠보다 낯선 마을이 많다

오늘 다녀가는 사북이 그렇다

사람들 돌아올 시간은 멀고

골목 저 끝에서

햇볕 몇 조각이 힘겹게

사람을 기다리다

사람을 기다리다

저희들끼리 퍽퍽 가슴을 두드린다

이 마을이 낯설다는 이야기다

아직 어둠이 멀었다는 이야기다

 

 


 

 

이강산 시인 / 살구

 

 

오늘도 살구가 떨어지고

살구를 주우려다 살구를 밟고

발바닥 가득 살구의 신음이 고이고

어제보다 깊어지고

 

오늘도 마음이 떨어지고

마음을 주우려다 마음을 밟고

발바닥 가득 마음의 신음이 고이고

어제보다 깊어지고

 

-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 시작

 

 


 

 

이강산 시인 / 가슴을 맞았다

 

 

바람이 창을 열었다

서둘러 모과밭으로 갔다

 

가슴으로 모과 한 알이 툭, 떨어졌다

 

-바람 부는 대로 나도 언젠가 모과처럼 떨어지면 좋겠다

지난 가을의 독백을 엿들은 게 분명하다

 

여러 해 전 처음 모과를 수소문한 그 시월

내게 모과의 거처를 귀띔해준 대화공단 근로자복지회관 경비 오 씨

눈사람에 종종 국화배꼽을 꽂아둔 오 씨

 

연탄가스를 마셨다

오늘 새벽

 

아내 둘 상처하고 떠나고,

아직은 견딜 만해서 봄부터 배꼽을 키웠을 오 씨

떨어지면서 누구의 가슴을 때렸을까

 

-바람 부는 대로 나도 언젠가 모과처럼 떨어지면 좋겠다

해묵은 독백에서 연탄가스 냄새가 난다

 

어디서 눈사람 소식이라도 엿들었는지

모과 한 알이 툭, 떨어졌다

나를 겨냥한 것처럼 명치를 뚫고 지나갔다

 

 


 

 

이강산 시인 / 석류

 

 

석류나무엔 그늘이 없다

유월 어디서든 석류나무 아래 서보면 안다

아, 석류!

반갑게 다가서다가

느닷없이 석류꽃에 맞아보면 안다

한순간 통증이 번지는 몸 어디선가

석류꽃 피멍이 드는 것처럼

붉고 뜨겁게 환해지다가

마음의 그늘마저 사라지는 것을 안다

행여 석류꽃의 물살에 잠기면

몸속의 도랑을 타고 오르는 물소리에 젖어

언젠가, 유월 언젠가

당신의 나무 아래 서서

당신의 붉은 꽃에 맞아도 보고 싶다며

잠시 나를 잊는 나를 안다

 

 


 

 

이강산 시인 / 호수 가정식백반

 

 

 백반 쟁반 두 판 거머쥐고 발발발, 배달 가는 동현 엄마는 장수하늘소다

 팔뚝은 뿔, 다리는 갈쿠리다

 토란국생선찜누룽지, 파문 한 점 일지 않는 수평이라니

 저 수평이 장수하늘소를 호수 뒷골목까지 끌고 왔다

 

스크린골프장, 카센터 밥그릇 쓸어 모아 뿅뿅뿅, 달려가는 상주댁은 소금쟁이다

 축지법으로 단박에 물 건너간다

 그 속도가 아니면 익사라도 할듯하다

 부랴부랴 소금쟁이 좇아가면 호수는 청둥오리숲이다 꾸룩꾸룩, 꾹꾸

 

 벌목장에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호수 건너오느라 깃털 절반이 얼어붙었다

 밥상 밑에서도 물갈퀴를 휘젓는지 탈탈탈, 밥상이 떨린다

 다시 호수 건너려면 어떻게든 깃털이 녹아야 되므로

 당장 소금장수라도 삼킬 기세다

 

 소금쟁이와 청둥오리가 한 몸이 되면 입춘까지는 호수에서 견딜 수 있을까

 꾸우꾹, 청둥오리숲 흔들리는데

 쟁반 든 장수하늘소 다시 수평이다

 

 


 

이강산 시인

1959년 충남 금산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1988년 《삶의 문학》과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 『물속의 발자국』 『모항』 『하모니카를 찾아서』. 2014,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시부문), 대전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금(소설) 수혜. 현재 '평상' 동인으로 활동. 대전 신탄진중학교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