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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을 시인 / 달빛이 감전되다
생일 축하해요 8월 중에 한번 봤으면 합니다 지하철 출구 스테인리스 은빛 핸드레일 줄서기에 새우 꼬리가 닿았다면 몸서리치며 등이 펴질 불볕더위에요 고맙습니다만 나이를 먹는다는 게 서글프기만 합니다 지하철 감전역 일번 출구까지 올라가야 할 계단이 열다섯 개 남았을 때였습니다 그가 정수리에서 눈썹 경계까지 지문 가장자리 한 가닥도 빠지지 않도록 고루 문질러 머리칼을 흩트려 놓았어요 다알리아가 까만 외투를 벗었을 때였을 겁니다 새집을 막 찾을 때였으니까요 아마 그때였을 겁니다 눈썹 밑으로 서걱서걱 내려오는 지느러미를 알아챈 것은 언젠가는 야외 카페에서 형체 있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황금 크레마 덮인 커피 한 잔 하고 싶습니다 달빛이 마지막 계단을 발가락에 힘을 주고 내디뎠을 때 웃고 있었습니다
-2018년 4분기 애지 신인상 작품 중
정가을 시인 / 거지덩굴
그는 자라면서 왜 그렇게 많이 맞았는지에 대해 생각하며 길을 가는 중이었다
(웃음소리인듯 소곤대는 소리인 듯 미세한 소리)
벽돌 빛 뾰족한 모퉁이에서 어깨만 한 물구덩이가 만들어 졌다
(달은 구름도 모르게 구덩이의 색을 얹었다)
그는 오른발을 먼저 담그고 왼발을 담근다 코끝까지 이마 끝까지 정수리까지
(따뜻하고 물렁한 쿠션)
모은다리 사막을 더듬는 식물처럼 땅으로 쭈욱 뻗었다
(구덩이의 물이 튀었다)
그는 어제 본 앙증맞은 분홍 꽃의 이름이 거지덩굴인 이유에 대해 생각하며 길을 가는 중이었다
(웃음소리인 듯 수군대는 소리인 듯 미세한 소리)
-시집 《빌어먹을 다짐들>에서
정가을 시인 / 나도 한 번쯤은 웨이브를 추고 싶다
아침부터 불안한 사람이 있다. 한족 손으로 봉을 쓰다듬고 다리는 웨이브를 치고 있다. 다른 한 손에 쥐고 있던 커피를 몇 번이나 떨어뜨리고 손잡이를 잡으려고 허공에 손짓을 하고 심지어 내리려 서 있는 사람 머리를 만지기도 한다(요즘은 세상이 뒤숭숭해서 그런지 약을 했나 하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백팩을 고쳐 메고 대학이 있는 곳에서 내리는 걸 보니 멈추지 않고 아침까지 마신 대학생인 모양이다 취하라, 다시 취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나도 한 번쯤 은 웨이브를 추고 싶다)지하철 앞줄에 앉아 있는 여섯 사람이 모두 운동화를 신었고 운동화색이 여섯 중 다섯이 흰 색이다 이제 슬슬 여름을 준비해야 하는가 보다
정가을 시인 / 빌어먹을 다짐들
오늘, 붙은 먼지인가 했는데 몸이 마르더니 떨어졌다 오늘, 그제서야 앉아서 보는데 흰 점의 등이 생겼다 오늘, 출근시간 환승역 승강장 다리는 보이지 않는다 오늘, 구멍에 구멍보다 조금 크게 그물망을 잘라 얹고 손가락 두 마디 높이로 흙을 깔고 오늘, 뿌리를 잘 세운 뒤 빈 공간에 흙을 채운다 오늘, 공기가 통하도록 너무 누르지 않는다 오늘,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떨어지면 훑어도 되는데 오늘, 절대 흘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처럼
-시집 <빌어먹을 다짐들>에서
정가을 시인 / 비단무늬 물뱀 입술 피어싱
한숨 자고 나온 그 두 뼘 커져 있다 보랏빛 입술 침 마를 때마다 등 곧추세웠는데 그때마다 투명색 구멍이 생겼다 잊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바벨을 달았다 산 채로 먹힌 자들이 지르는 비명 비단무늬 입술 자꾸만 커지고 있다 마당으로 나와 동백꽃 나무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혼자 조금 외롭게 있으니 꽃이 보이는구나 백일밖에 남지 않았어요 세로로 일어났다 사선으로 앉기를 반복하는 매화노루발 쇄골이 삐져나온 어깨가 단단해지고 있다 -시집 <빌어먹을 다짐들>에서
정가을 시인 / 파래
#1
지하철 문 열리자 가슴께까지 접어진 상자 견고한 건물처럼 지어져 있다 허리 굽혀 손수레 방향을 튼다 바퀴가 빠지지 않게 힘껏 당긴다 집으로 간다
#2
지하철 문 닫히고 물 아직 차지 않았는데 에어컨 바람에 옷 여민다 슈트 소매 끝 물 배어 나왔다 비닐 깔고 의자 바닥에 몸 걸쳤을 뿐 물속보다 더 깊은 길 차가워진 손바닥 무릎에 닿게 해본다 졸고 있는 척하는 무릎을 감싸본다 옆에 있는 남자는 꾸벅꾸벅 졸고 있다
#3
오후 5시 기침이 새어 나와 건물 밖으로 나간다 열 감지기는 지쳤다 목에서 피 맛이 났다 고개 들어 하늘 보는데 휘갈겨진 구름 모양 아름다웠다
#4
봄여름가을겨울 거리두기 3단계가 되면서 사계절이 모였다 봄 44세 오십견 겨울 백내장 수술 아가미 세포 생성하는 시간 가을 도다리가 고마웠다 여름은 다소 풍채가 좋아지는 것이 고민이긴 하지만 주말, 함께 빡세게 일했다 유리문이 파래서
-시집 『빌어먹을 다짐들』에서
정가을 시인 / 전철이 잠깐 흔들렸는데
개나리색 머리를 한 아이 엄마가 아이를 앞으로 안은 채 젖병에다 보온병의 물을 붓고 뚜껑을 돌려 닫았다
아이가 온몸 돋움을 하며 울었다
전철이 잠깐 흔들렸는데 그때 젖병이 떨어졌고 맞은 편에 앉은 이의 발을 향해 굴렀다
지구계의 시간으로 아주 잠깐 의심했지만 젖병이 구르자 그 옆의 거구의 남자가 우주계의 믿기지 않은 속도로 움직여 낚아챘다 반사적인 행동이라고 결론짓지 않았다
보는 계속 머릿속에서 고리타분한 연민의 단편들이 지나갔는데 그 순간에 그러한 이야기를 짓고 있는 내가 제일 고리타분하다는 것을 느꼈다
속력은 터벅한 표정으로 아이와 엄마를 쳐다보았다
-시집 <바질토마토>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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