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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규성 시인 / 오래된 악수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3.
김규성 시인 / 오래된 악수

김규성 시인 / 오래된 악수

 

 

오래 전 내 작고 야윈 손에서 사라진 달

 

그 보름달이 시방 여기 있구나

 

내내 손 안에 있던 것

 

잃어버린 것은 달이 아니라

 

닳아져버린 촉감이었다

 

 -시집 『시간에는 나사가 있다』에서

 

 


 

 

김규성 시인 / 거울놀이

 

 내가 거울을 보는 게 아니고 거울이 나를 보고 있다 눈에 먼지가 날아와 앉는다 거울에도 먼지가 날아와 앉는다 내 시야는 두 배로 흐려진다 거울 속의 나도 잘 보이지 않는다 거울을 깬다 무수한 복제인간이 탄생한다 내 주소는 사방으로 눕고 안고 서고 부딪힌다 내 주민등록은 위조지폐처럼 동일 번호로 복사된다 차디찬 거울 조각들을 다시 모은다 틈과 틈을 봉쇄한다 나는 다시 하나의 제국이 된다 그러나 종전의 거울이 아니듯 종전의 내가 아니다 거울에 놀아난 나, 거울을 먼지보다 작게 부순다 나는 먼지와 동시에 거울 속에서 실종된다 거울도 사라진다 이제 거울을 보지 않아도 된다

 

-시집 <중심의 거처>, 문학들, 2022.

 

 


 

 

김규성 시인 / 화장실 시론

 

 

더러는 산중에 들었으니

 

시 좀 써지지 않겠느냐고 부추긴다

 

그러나 나는

 

산에서는 시와 만나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몇 편의 시를 건졌다

 

깊은 밤이나 이른 새벽

 

끙끙 앓아가며 숙변을 볼 때

 

난데없이 시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마음을 비운다는 산에 와서는

 

그보다 뱃속을 비우며, 그 악취가

 

생각의 저만큼 사라지는 순간

 

부리나케 시를 건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시는

 

화장실 변기 구멍 속에 있었다

 

허긴 세상의 언어로 시를 쓰며

 

어찌 세상을 멀미난 듯이 떠나서

 

시를 구할 것인가 그런데

 

아직까지도

 

식탁에서는 시를 만나지 못했다

 

진수성찬일수록 더 그랬다

 

 


 

 

김규성 시인 / 고맙다

 

 

나뭇가지에서 낳고 자란

옷 몇 벌 갈아입다가

소리도 없이 지는

 

낙엽은 왜 돌아간다고 할까

 

이 세상을 향한

마지막 한마디가 다만

고맙다, 이기를

 

오늘도 나는

그 말을

당신과 함께 나눈다

 

고맙다

 

-시집 『중심의 거처』, 《문학들》에서

 

 


 

 

김규성 시인 / 피서

 

 

딸아이가 기르는 고양이하고 논다

고양이는 사냥감을 쫓고 나는 또

그것을 감추는 놀이인데

장난감은 마냥 쫓기면서도

숨은 척 하며

고양이의 눈을 기다리고 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놀아주다가

어느새 함께 논다

방안은 온통 놀이터고

벽시계 초침 소리도 고수가 되어

함께 어울려 논다

지구를 고양이 눈에 싣고

별세계로 휴가를 온 것일까

새로 산 티비는

저만큼 떨어져 혼자 떠들고 있다

 

 


 

 

김규성 시인 / 안개

 

 

첫새벽 안개 아득하다 그러나

 

안개는 청명을 품고는 자꾸만 간지러워서

 

풀숲에 강에 제 몸을 비비려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마라 태양은

 

종일 내리쬐지만

 

안개는 이내 그치고 말지니 태양은

 

칠흑의 밤이 낳듯이

 

안개도 어서 청명을 낳고 싶은 거다

 

 


 

 

김규성 시인 / 망둥어 국

 

 

여든 여덟 어머니가 끓여주신 망둥어 국을 먹는다

평소 간간하던 간이 영 싱겁다

짠 것은 내 혈압에 해롭다는 지나친 염려 탓이시다

그런데 아무래도 통 몸통이 보이지 않는다

살점은 손자들 다 주고

엊그제 큰아들 떠나 하나뿐인 아들에게

설마 뼈다귀만 일부러 골라 먹이실 턱은 없는데,

아! 가뜩이나 어두운 눈에 전기를 아끼느라고

컴컴한 부엌에서 급히 큰놈을 고르다보니

애먼 대가리만 눈에 밟히셨구나

기막힌 魚頭一味

골라 낸 것들을 다시 천천히 발라먹는다

눈물이 한 방을 뚝 떨어져 마침 간을 맞춰준다

 

 


 

김규성 시인

1950년 전남 영광 출생. 200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고맙다는 말을 못했다』 『신이 놓친 악보』 『시간에는 나사가 있다』. 산문집 『산들내민들레』, 『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