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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경 시인 / 연연한 그리움
당신 방향에서 가을이 붑니다
바람결에 물든 잎 하나도 떠도는 마음을 건드리며 가슴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뜨겁게 온 흔적을 안에 담아본 것뿐인데 붉어진 내가 울컥 흔들립니다
사람을 품고 산다는 일은 어떤 것일까요 핑 도는 그대가 가을 속에 너무 많습니다
외로운 계절에 만났던 사람
스산한 바람에 그대 생각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부질없는 욕심으로 그 사랑을 다 떨궈내지 못한 채 가을이 떠나가네요
햇살을 버리고 있는 나무에 서서 잔잔하게 파고드는 그리움을 안고 수신처 없는 편지를 씁니다
이현경 시인 / 도화역
내 마음의 경로가 레일 위를 달린다
이름이 도화인 역을 지나갔을 뿐인데 복사꽃숲을 명랑하게 걷는 것처럼
내 안에서 문득 꽃망울이 터지고 공기의 결을 따라 향기가 역사에 번진다
도화꽃이 되었던 추상
지난날 빛살 속에서 눈으로 수집했던 꽃향기가 내 기억을 환원시킨다
연분홍 꽃잎으로 가득했던 빛깔들
다시 이곳을 지나갈 때는 온통 복사꽃 숲길이 되어 가지마다 열매로 둥글게 부풀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1호선 노선도를 볼 때마다 도화 숲이 온몸에서 일렁인다
이현경 시인 / 풍경을 끌어당기네
적막한 고립 속에 바람이 부서지네
거친 풍랑에 법당 처마 끝 풍경이 단청을 밀고 솟구치네
중심점에 고독하게 매달려 차랑거리며 구름 위로 퍼득이네
은연히 번지는 소리, 나의 외로움이 가만히 풍경을 끌어당기네
이현경 시인 / 안개의 구간
가슴속에는 안개의 마을로 가야 할 설렘이 가득하다
과묵한 운무의 입자는 지상의 표정을 가리기 위해 신이 심어놓은 물의 씨앗들
색의 경계를 지우며 자욱이 밀려오는 안갯속에서 가슴으로 오고 있는 한 사람의 기억을 재생한다
촉촉한 알갱이에 영혼을 적시며 형체 없는 마을에서 설레는 기척을 찾는다
태양은 안개에 젖어 비틀거리고 하얀 미로 속을 아무리 헤매어도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아
안개를 동공에 흠뻑 묻히고 설핏 떠다니는 그 사람의 체취를 탁본한다
이현경 시인 / 붉은 태양을 지우는 것들
다낭 거리의 강렬한 햇살이 낯설다
나는 싫은데, 발소리도 없이 종일 따라다닌다
더위를 지우는 긴 회랑을 지나 바나 힐스로 가기 위해 케이블카를 탔다 산마루에 오르자 폭포수가 심장의 온도를 내리고 깊은 계곡마다 음지가 웅크리고 있다
붉은 태양을 지우는 것들
월맹군이 파놓은 토굴도 전쟁의 뜨거운 시간을 지웠을 것이다
난민들이 수장된 슬픈 바다의 소용돌이 속으로 심오한 세상을 지우기 위해
저녁이 하루치의 해를 접어 풍덩 빠진다
이현경 시인 / 초록섬
내 안에 흐르는 그대 생각에 파릇한 맥박이 있는 영지로 떠납니다
그리움 대신 훈풍을 안고서
파도를 넘어 심장이 뛰는 대로 따뜻한 예언의 땅으로 갑니다
뱃머리에 서서 같이 지내던 지난 회상에
배에 파도가 부딪쳐 물이 튀고 또 튀어도 지우지 못하는 상념을 품고
설렘이 있는 수평선 너머로 갑니다
그대 느낌이 불어오는 배 위에서 가슴에 일던 이름 하나를 품속에 안고
푸르게 덮어줄 그대 생각으로 봄이 뛰어노는 초록의 섬으로 갑니다
이현경 시인 / 넝쿨의 손톱이 되어
밑그림도 없이 빈칸을 촘촘히 채우며 제 삶을 담장에 엮고 있다
입 다문 수직벽은 넝쿨의 가든
어린 손톱을 세우고 밤이 되면 벽에 앉은 달빛을 밟고 공중의 길을 오른다
중력을 거부하고 어린아이가 쏟은 물감처럼 은하 쪽으로 번지고 있다
모진 바람에도 벽을 꼭 움켜쥐고 있는 담쟁이를 보며 사유하는 시간
그 사람 살 냄새가 너무 깊어서 망설이던 손이 넝쿨이 되어 벽처럼 서 있는 그 사람 전부를 휘감고
담이 쓰러질 때까지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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