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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 시인 / 무너지는 서녘
조각난 아스팔트 궛전 울린 드릴 소리 묵묵한 석공들 손길 하루를 쪼아댈 때 재개발 도시 난민의 숨소리도 잦아든다
능소화 돌담 넘는 한여름 열기 속에 장대 지른 빨랫줄 기저귀 말리는 바람 툇마루 따가운 햇살 먼 메아리 실려온다
시멘트 정글로 떠난 누이 가족 짠한 얼굴 무너진 하늘 한끝 놀 쪽으로 등 돌리고 땅거미 지는 서녘에 흐릿하게 얼비친다
-《정음시조》 2022. 제4호
김윤 시인 / 굴레
빛바랜 사진에서 울고 있는 나를 본다 꽃잎 져 흩날리던 시린 봄날 뒤안길에 덧없이 닳아진 지문 볼 붉혀 되짚는다
작설 잎 낙엽이 되는 삼대 기일 그 차례상 흘끔거린 어른 눈빛 떨린 손목 저려오고 유성우 쏟아지는 밤, 돌 하나 가슴에 묻고
작파할까 작파할까 보따리 싸다 다시 풀고 외면 못할 여린 숨결 모성이 족쇄였나 숨어서 적신 눈물 흥건, 부적으로 쌓인 밤
-《정형시학》 2019. 겨울호
김윤 시인 / 죽은 느릅나무
천 개의 팔을 가진 부처처럼 손바닥마다 별을 들고 그는 수몰된 마을에서 여기까지 걸어왔다 캄캄할 때 나무가 짐승같이 흐느끼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다 빗물 받는 커다란 항아리같이 몸속에서 출렁거리는 강물 소리가 났다 물은 흘러서 때로 두고온 마을에도 닿을 테지만 이 풍진 세상에서 그는 부대끼며 살고자 했다 한겨울 늙은 느릅나무가 도시 한가운데서 천천히 죽었다 자살이다 그의 빈 몸이 맨발로 의연하게 서 있다
-『문학청춘』 2020-봄호
김윤 시인 / 산벚
꽃핀 산벚 한 그루가 막 어두워지는 그늘 한 채를 제 발치로 슬쩍 감추네 주막의 맨발처럼 농익은 발 겨우 등 떠밀려 온 산길이 분홍으로 펄럭이는데 폭설로 쏟아지는 해거름
저 아래 두런두런 산일하는사람들 어둔 목소리 녹슨 삽같이 어눌하고 어둑한 언저리 제 그림자를 적시며 녹는 눈발 같은 꽃잎
무슨 슬픔 같은 것이 이 악물고 아직 남아서 더 삭으려고, 다 삭히려고 봄 산 한 자락 얼른 산벚나무 환한 속 휘적휘적 걸어 들어가 캄캄하게 눕는 것 보네
김윤 시인 / 광화문에서 길을 묻다
부르튼 발목으로 아스팔트 서성이다 나목마저 불꽃 감은 용궁 같은 광화문 만 갈래 빛의 미로에서 문득 길을 잃었다
흙먼지 낙진처럼 흩날리는 골목 어귀 놓쳐버린 길목에서 시들부들 녹슬다 줄줄이 삭아 내리는 철문 같은 나를 본다
젖은 구두 말려줄 바람이 눈 뜨는 거리 세종로 후미진 길 마른 숨을 고르며 반갑게 꽃잎 물고 올 봄빛 삼가 기다린다
-시집 『아무르강』, 고요아침 2019
김윤 시인 / 삼성동
애 한번 안 낳아 본 그대 배 속에 나 덜컥 들어앉아도 되나 눈 오는 밤 절절 끓는 온돌 방 목화솜 요 밑으로 맨발 들이밀듯 직방으로 내 언 맘 녹여도 되나 그대 깊은 속 캄캄한 둠벙 내 물갈퀴로 흔들어도 되나 나 흔들려도 되나 한 저녁을 그냥 쌀가루로 눈이 오는데 봉은사 목어가 딱딱 이를 가는데 삼성역 고갯길 국숫집에 앉아 어복쟁반 속 숨죽은 배추 잎 창밖 길 막히고 술은 차고 그대 등판 푸른 가시들 파랗게 독 오를 때 거기 내 속 문질러도 되나 깽판 쳐도 되나
김윤 시인 / 빈 간장 항아리
비운 지 삼년이 지난 간장 항아리에 아직도 소금발이 서려 있다 절여진 시간이 내려앉고, 우려내고 씻어내도 항아리 내벽에 붙어 있는 마른 바다의 숨소리 뜨거운 채 하얗게 꽃 피우고 있다 한때는 짙푸른 여름 콩꽃이었을 그 하늘 비어 있다 곰삭은 욕망이 빈 항아리 가득 배를 채우고 빙열 같은 실핏줄을 태우고 있다 알을 다 내보낸 내 애기집 속에도 바람 아직 소금처럼 달고 더운 숨결 가득 부둥켜안고 있나 간장이 익어가듯 달여진 세월이 물푸레나무처럼 흔들리고 있나 햇살 가득한 뒤꼍 빈 항아리는 목이 탄다
내 안 가득 피어나는 소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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