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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주 시인 / 길을 읽다
낯선 글자뿐 파출소를 지나고 구두수선집을 지나고 포장마차를 지나며 한 자 한 자 짚어갔다 여기저기 손짓하는 어둠의 샛길에서 앞뒤 문장이 헛갈려 한참을 망설이다 그냥 놓아버리고픈 쩍 벌어진 마음 바짝 틀어쥐었다 네온사인으로 모여드는 하루살이 길을 비켜 들어선 골목길 행간 사이 울타리 잃은 내 아이의 그늘진 깊은 눈매에서 내 길을 읽었다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고 천천히 꼭꼭 씹어 읽었다
이금주 시인 / 끌림
처음 보는 순간 단번에 날아가 화살처럼 꽂혔다 심장이 팽팽해졌다 시작된 고난의 눈길 닫으려 해도 열리는 마음, 막아 현실이 속도를 제한하는가 하면 뻗어 가는 마음 줄기에 가위가 달려들기도 하고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회초리를 들었다 자라목으로 숨죽이다 탱탱해진 호기심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는 끌림 풀 수 없는 관심은 시제가 되어갔다 더했다 빼고 곱하고 나눠 봐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다시 그래도 또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문제
이금주 시인 / 나는 돌고 있다
버스를 탔지 초행길이지만 지나치는 정류장의 명칭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 풍광이 잘 보이는 창 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살얼음 낀 언덕을 오를 땐 발바닥에 힘을 주고 같이 낑낑거리기도 하고 캄캄한 굴속을 지날 때면 눈을 더 크게 뜨고 급커브 돌 때는 같이 몸 기울이며 균형을 잡았지
앞차의 꽁지도 보이지 않는 산길로 접어들고 구멍 난 상처 꾸덕꾸덕 말려주는 바람 좋은 강을 끼고 달리다가 허상에 걸린 쌍무지개 따라가고
속이 울렁거려 헛구역질하다 혀가 꼬여도 종착역만 생각했지 어깻죽지가 아파오고 삭신이 쑤시기 시작했을 때 차창에 비친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까무러치는 줄 알았지 내 얼굴에 길을 내며 쳇바퀴 돌듯 그 길을 돌고 있었던 거지
나는 순환 버스를 탔던 거야 끝 번호 두 자리 숫자가 같아 잘못 알고 발을 올려놓은 순간부터 나는 돌기 시작한 거지 처음부터 내가 내릴 역은 없었던 거지 버스의 기사는 당신도 그대도아닌 바로 나 나였었지
이금주 시인 / 소통
밤 9시 뉴스 혹한이라며 계량기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수돗물의 길을 조금 터주라고 말한다
나는 적당한 통로를 찾으려고 애썼다 또옥은 너무 작아 조막손에 멋쩍어 움찔하기도 하고 주울 줄은 너무 커 헤프게 흘려버리는 것 같기도 해 샛길 하나 만들기로 했다
이리저리 잣대를 들이대보아도 보고, 맛보고, 씹고, 뱉는, 일직선상에 순서 없이 나열되는 생각 예각일지 둔각일지 알 수가 없어 내 마음 꼭지 열었다 닫았다 너의 뇌수 끝에 단단한 소실점 하나 찍으려 한다
죽였다 살렸다 오가는 손이 빨라진다
-시집 <혹시! 거기있나요> 에서
이금주 시인 / 그 섬에 가고싶다*
수평선 너머 허공에 둥실 뜬 집 한 채 별 서넛 내려와 불 밝힌 곳
아늑하여라 아득하여라
망끝*에서 되살아나는 머물고 싶은 시간의 시선 말끄러미 쳐다보며 어서 오라네
내 명치 끝에 곱게 새겨둔 이름
혹시! 거기 있나요
*정현종시인의 시 <섬>에서 인용 *망끝: 보길도의 서쪽 끝 전망대
이금주 시인 / 안개
그는 모호한 시였다. 언저리였다 늘 에둘러 오거나 갔다 언덕길 위에서 보이는가 하면 사라졌다 손잡는 건가 하면 밀어내는 것이었다 가까이 온 것 같다가 시야 끝에 망연히 서 있었다 그러나 옆구리 한쪽은 비워두고 채워질 때를 바라는 것 같았다 아니 그랬다 모호한 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난해한 시가 되어 갔다 나는 결국 독해를 포기했다
이금주 시인 / 각설탕이 녹는 시간
툭하면 왜 딱딱하고 뾰족한 말을 내뱉느냐고요? 새하얗게 각을 세우냐고요? 제가 그랬군요 풍진 세상이라 그렇게 된 것 같군요 저 혼자선 힘들 것 같아요 촉촉한 말 따듯한 손 내밀어 주실래요 각진 마음 말랑하게 둥그러지도록 참고 기다리고 있으니 가둬진 말 풀려 나올 거라 믿어요 당신과 내 가슴, 달달하게 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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