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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금주 시인 / 길을 읽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3.
이금주 시인 / 길을 읽다

이금주 시인 / 길을 읽다

 

 

낯선 글자뿐

파출소를 지나고 구두수선집을 지나고

포장마차를 지나며

한 자 한 자 짚어갔다

여기저기 손짓하는 어둠의 샛길에서

앞뒤 문장이 헛갈려 한참을 망설이다

그냥 놓아버리고픈 쩍 벌어진 마음

바짝 틀어쥐었다

네온사인으로 모여드는 하루살이 길을 비켜

들어선 골목길 행간 사이

울타리 잃은

내 아이의 그늘진 깊은 눈매에서

내 길을 읽었다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고

천천히 꼭꼭 씹어 읽었다

 

 


 

 

이금주 시인 / 끌림

 

 

처음 보는 순간

단번에 날아가 화살처럼 꽂혔다

심장이 팽팽해졌다

시작된 고난의 눈길

닫으려 해도 열리는 마음, 막아

현실이 속도를 제한하는가 하면

뻗어 가는 마음 줄기에 가위가 달려들기도 하고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회초리를 들었다

자라목으로 숨죽이다

탱탱해진 호기심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는 끌림

풀 수 없는 관심은

시제가 되어갔다

더했다 빼고 곱하고 나눠 봐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다시 그래도 또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문제

 

 


 

 

이금주 시인 / 나는 돌고 있다

 

 

버스를 탔지

초행길이지만 지나치는 정류장의 명칭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

풍광이 잘 보이는 창 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살얼음 낀 언덕을 오를 땐 발바닥에 힘을 주고 같이 낑낑거리기도 하고

캄캄한 굴속을 지날 때면 눈을 더 크게 뜨고

급커브 돌 때는

같이 몸 기울이며 균형을 잡았지

 

앞차의 꽁지도 보이지 않는 산길로 접어들고

구멍 난 상처 꾸덕꾸덕 말려주는 바람 좋은 강을 끼고 달리다가

허상에 걸린 쌍무지개 따라가고

 

속이 울렁거려 헛구역질하다 혀가 꼬여도

종착역만 생각했지

어깻죽지가 아파오고 삭신이 쑤시기 시작했을 때

차창에 비친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까무러치는 줄 알았지

내 얼굴에 길을 내며

쳇바퀴 돌듯 그 길을 돌고 있었던 거지

 

나는 순환 버스를 탔던 거야

끝 번호 두 자리 숫자가 같아

잘못 알고 발을 올려놓은 순간부터

나는 돌기 시작한 거지

처음부터 내가 내릴 역은 없었던 거지

버스의 기사는 당신도 그대도아닌 바로 나

나였었지

 

 


 

 

이금주 시인 / 소통

 

 

밤 9시 뉴스

혹한이라며 계량기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수돗물의 길을 조금 터주라고 말한다

 

나는 적당한 통로를 찾으려고 애썼다

또옥은 너무 작아

조막손에 멋쩍어 움찔하기도 하고

주울 줄은 너무 커

헤프게 흘려버리는 것 같기도 해

샛길 하나 만들기로 했다

 

이리저리 잣대를 들이대보아도

보고, 맛보고, 씹고, 뱉는,

일직선상에 순서 없이 나열되는 생각

예각일지 둔각일지 알 수가 없어

내 마음 꼭지 열었다 닫았다

너의 뇌수 끝에 단단한 소실점 하나 찍으려 한다

 

죽였다 살렸다

오가는 손이 빨라진다

 

-시집 <혹시! 거기있나요> 에서

 

 


 

 

이금주 시인 / 그 섬에 가고싶다*

 

 

수평선 너머

허공에 둥실 뜬 집 한 채

별 서넛 내려와 불 밝힌 곳

 

아늑하여라

아득하여라

 

망끝*에서 되살아나는

머물고 싶은 시간의 시선

말끄러미 쳐다보며

어서 오라네

 

내 명치 끝에 곱게 새겨둔 이름

 

혹시!

거기 있나요

 

*정현종시인의 시 <섬>에서 인용

*망끝: 보길도의 서쪽 끝 전망대

 

 


 

 

이금주 시인 / 안개

 

 

그는 모호한 시였다.

언저리였다

늘 에둘러 오거나 갔다

언덕길 위에서

보이는가 하면 사라졌다

손잡는 건가 하면

밀어내는 것이었다

가까이 온 것 같다가

시야 끝에 망연히 서 있었다

그러나

옆구리 한쪽은 비워두고

채워질 때를 바라는 것 같았다

아니 그랬다

모호한 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난해한 시가 되어 갔다

나는 결국 독해를 포기했다

 

 


 

 

이금주 시인 / 각설탕이 녹는 시간

 

 

툭하면 왜

딱딱하고 뾰족한 말을 내뱉느냐고요?

새하얗게 각을 세우냐고요?

제가 그랬군요

풍진 세상이라 그렇게 된 것 같군요

저 혼자선 힘들 것 같아요

촉촉한 말

따듯한 손 내밀어 주실래요

각진 마음 말랑하게 둥그러지도록

참고 기다리고 있으니

가둬진 말 풀려 나올 거라 믿어요

당신과 내 가슴, 달달하게 적실....

 

 


 

이금주 시인

서울 출생. 동덕여대 가정학과 졸업. 2003년 《미네르바》 등단. 시집 『혹시! 거기 있나요』 『나는 돌고 있다』. 한국문학인상 수상. 현재 미네르바 작가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