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박언휘 시인 / 그녀의 그림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3.
박언휘 시인 / 그녀의 그림

박언휘 시인 / 그녀의 그림

항암치료를 하는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번의 항암치료를 마쳤고

일곱 번만 더하면 끝난다고 했다.

끝나면 제주도에서

그림을 그리며 요양할 예정이란다

그때 제주도에서 만나자고 한다

보고싶어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파도소리가 들린다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그녀의 그림은 대작이다

작은 체구에다 병색이 있는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채는 강하고 굵다

모든 사물은 거대하게 일어난다

이제 그녀는 바다를 그린다

무한대로 펼쳐지는 바다와 우주,

출렁이는 파도와

넘쳐서 보이지 않는 바닷내음까지 그려낼 것이다

드디어 바다 너머 그 너머의 세상까지 그리고는

그림을 배경으로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서 있을 것이다.

다시 들려온다

이제 항암치료가 마지막 한 번 남았대요

한 번만 더 받으면 끝이래요

끝이 있다는 걸 이제는 믿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흐느낌처럼 들려온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끝이 있다는 걸 믿기에

오늘을 견디는 겁니다.

그날이 오면

그녀의 그림을 배경으로 나란히 서서

이 세상의 배경이 되고 싶어요

ㅡ계간 《시인시대》(2025, 봄호)

 

 


 

 

박언휘 시인 / 달밤

 

 

내고향 울릉도를 닮은 반달

안으로만 차오르던 그리움이 있어

너를 바라본다

 

달빛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

환하고 밝은 소리가

내가슴을 적셔 오네

 

이 그리움,

차마 혼자 간직할수 없어

그대 잠든 한밤에

달빛 파도되어 그대가슴으로

밤새 홀로 철썩이다가

 

그대 눈뜨는 아침이면

다시

나홀로 저물어 가리라.

 

 


 

 

박언휘 시인 / 행복한 여백

 

 

바람을 차고 오르는 솔개 깃처럼

찬란한 아침을 맞는 우리

순백한 맥놀이에

전율하는 하늘을 담아본다

 

가끔 구름사이로 내민

꿈일 것 같은 부적을 거머쥐고

지저귀는 새소리

그 날개위로 마음껏 누벼본다

 

유채꽃 피고 노랑나비 춤추던

언덕배기 채마밭 고랑으로

얼굴하나 묻어둔 그 씨앗 같은 희망을 토닥이며

메마른 흙 갈피를 열어본다

 

거기 앳된 밤하늘 별들은

눈썹을 닫고 잠들어 있는데

손끝에 잡힐듯 걸린 꿈 조각들만

등불을 켜고 눈썰매 끝에서 흔들리고 있다

 

아름답게 채색해가는

아침의 창밖에

밤새 다듬질한 모시 저고리처럼

오롯이 내 가슴에 걸린 풍경으로 설레인다

 

 


 

 

박언휘 시인 / 바람의 노래

 

나를 비웠다.

나를 버렸다

소나무에게 가면 솔바람이 되고

대나무를 스치면 대바람이 되었다

꽃을 스치면 꽃향기로 흐른다

간혹

폭풍으로 너를 무너뜨리고

너의 뿌리를 흔들지만

그 자리에

새 세상의 싹을 숨기는 것을 잊지는 않는다

완벽하게

나를 버리는 순간,

너 앞에서 사라져

오히려 너를 안고 흔들 수 있다.

ㅡ계간 《시인시대》(2022, 가을호)

 

 


 

 

박언휘 시인 / 엄마냄새

세상 근심

빗발로 흩날려도

넉넉한 치마폭

벌려주시던,

이젠

거칠고 뭉퉁해진

어머니의 손

내 유년 아직도

그 손금 골골마다

숨어 놀 텐데

바다내음 향기롭던

그 손, 너무 멀어

행여 하여

내 손 펴고 맞아보는

엄마 냄새

 

 


 

 

박언휘 시인 / 울릉도

 

 

어릴 적 눈을 뜨면

바다는 홀로 뒤척이고 있었다

가뭇없이 뒤척이는 바다를 바라보면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

 

바다는

하늘이고 땅이었다

 

 


 

 

박언휘 시인 / 이름을 부르면

 

 

문득 옹알이처럼 중얼거리는 이름이 있다

비오는 날이 아니더라도

때로 가슴에 젖어드는 이름이 있다

가문비나무처럼 굳건하다가도

은사시 나무처럼 바르르 떨며

아무도 몰래 부르면

눈시울에 걸리는 이름,

어느 새 통유리 너머에서 슬며시 나타났다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사람이 있다

아니다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왼쪽으로 사라지면 오른쪽에 나타나고

다시 배후에서 따라온다

세월이 긋고 간 주름 깊은 얼굴일지라도

허름한 지갑 한 쪽에 숨겨진 사진처럼

가끔은 꺼내 볼 수 있는

거울같은 이름들

문득 부르면

긴 갈기를 세우고 안겨오는 이가 있다

 

 


 

박언휘 시인

경북 울릉도 출생. 수필가, 컬럼리스트,의학박사, 경북대 의대, 미국 코헨대학 명예정치학 박사. 2010년 《한국문학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2017년 《문학청춘》 등단. 저서로는 동인문집  『내마음의 숲』 등이 있음.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  의사시인협회 부회장, 국제PEN클럽 이사 한국문학신문 논설위원, 한국일보 편집위원, 중앙일보객원논설위원, (사)대한민국보문인협회 시분과 위원장. 시계간지 <시인시대> 발행인. 대구 박언휘종합내과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