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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문숙 시인 / 모로 눕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3.
강문숙 시인 / 모로 눕다

강문숙 시인 / 모로 눕다

 

 

 따스하게 뎁혀진 동굴 속으로 파고든다 반듯하게 등을 대고 누우면 누구에겐가 미안해지는 밤 그녀는 모로 눕는다, 내장들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출렁거린다 하루 종일 켜켜로 쟁여 두었던 물기를 당기는 순간이다

 

 모로 눕는다는 것은, 지친 몸을 겸손히 접어서 밤에게 바치는 제물이 되어도 좋겠다는 것 속죄하는 어린양처럼 가지런히 모은 두 다리 사이로 뜨거운 것이 흘러 강가에 다다랐을 때 강물에 쓸려 가던 검은 돌들이 몸을 어루만지고 싶다는 것

 

 일생을 이렇게 착착 접어 두었다가, 어느 날 미라를 발굴하는 낯선 손바닥의 온기를 느낄 것만도 같은 울다가 잠이 들었는지 짓무른 눈가에 싹이 돋아날 것도 같은 한 오백 년 전의 몸이여, 잠들기 전에 뒤척이다가 끝내 모로 눕고 마는 저 지극한 호모 사피엔스의 생각하는 자세여

 

 


 

 

강문숙 시인 / 장미

 

 

이보다 아름다운 상처

어디 있을까

이보다 더 두려움 없는 사랑

어디 있을까

 

홍방울새 울음소리

현 위의 비명처럼

벼랑 끝에 선 시간처럼

 

 


 

 

강문숙 시인 / 우리 동네 송림서점 아가씨

 

 

우리 동네 송림서점 아가씨는,

먼지 털다 말고 화장을 한다.

보라색 아이섀도를 엷게 바르고

책장 넘기듯, 분홍립스틱을 바른다.

 

오늘은 아리보리색 모자를 손질해야지.

무표정하게 꽂혀있던 책들 사이,

느리게 시간은 몸을 뒤척인다.

활자들이 잠깐 기지개를 켠다.

 

교보문고가 한 달 동안 판 책을 쌓으면 63빌딩의 130배,

1톤 트럭으로 1130여 대 분량이라고 신문에 난 날,

당연히 기뻐해야 할 나는 왜 우울해지는지.

 

오래 꽂혀있던 저 책들처럼, 그녀를

뽑아들고 펼쳐 본 사람 아직 없다는데,

그녀가 아주 바빴으면 좋겠다. 화장도 못하고

모자의 챙이 구겨져 속이 상했으면 좋겠다.

 

 


 

 

강문숙 시인 / 정오의 聖所

 

 

아픔 없는 인생 없다

상처 없는 삶이 없다, 나는

시의 입을 빌려 말했지

 

병도 나의 스승이었고

꽃은 저 나무의 상처라고

가만히 고개 숙여 나를 위로했지

 

가시의 나중이 장미였거나

처음부터 가시였던 장미이거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혹은, 참을 수 없이 무거운 목숨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할 때

그 간절함으로 장미가 핀다는 걸

오래된 저 담장만이 알고 있지

 

가시를 껴안았더니 장미꽃이 피었구나

울고 있는데

가시관을 쓴 그의 이마에 흐르는 피

나를 들어 올린다

 

장미를 받아 적는 저 담장에

잠언처럼 가시가 박히는

붉은 정오의 聖所

 

 


 

 

강문숙 시인 / 아프지 마, 라고 네가 말할 때

 

 

한 사흘 대답 없던 톡에

깨알 숫자 사라지고 댓글 뜬다

 

주말엔 폰을 아예 책상 서랍에 넣고 지내

일찍 난로를 꺼 버린 탓에

감기가 왔나 봐

이제 난 좀 괜찮아졌지만

걱정했을 네가 더 걱정이야

너는 아프지 마

 

아프지 마, 라는 말 참 아프게 다정한 말

봄꽃 피려다가 꽃샘바람에 움츠러들 때

가는 입술 벌려 봄볕 받아먹고 있던

저 나뭇가지를 꺾어서 쓰는 말

 

어떤 색으로 피어날지 알면서도

난생 처음 본 색깔인 양 신기한 꽃잎 속

하얀 입김 같은 말

 

말에도 온도가 있어 느린 게이지 곡선으로 끌어올리다

노을 같은 발음으로 아프지 마, 네가 말할 때

아프다가도 나는 안 아프고 그래서 더 아프고

 

-시집 <나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천년의시작

 

 


 

 

강문숙 시인 / 하루

 

 

하루가 참 짧다. 생각하다가도

돌이켜보면 꽤 길다

 

해 뜨고 해 지는 일 어디 만만한 순례길인가

 

꽃잎을 여느라, 모란은

한나절 얼마나 용을 써댔을 테고 구름은 또

동에서 서으로 발이 부르트도록 건넜을 것이었다

 

그대에게로 가는 길

손끝 닿을 듯 지척이다 싶다가도

아직 너무 멀어 반도 못왔다

 

하루 해 저리도 중천인데

사람들은 자꾸만

짧다. 짧다. 헛꽃 피우 듯 중얼거린다

 

 


 

 

강문숙 시인 / 둥글둥글 저 시간의 연대들이

 

 

언제부턴가 고분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자음과 모음들이 조금씩 어긋나는가 싶었는데

 

자고 일어나 천천히 자세를 바꾸어 앉는 옛사람들처럼

조금씩 삐뚤어지는 것 같기도 해서

나무의 기울기를 다시 눈대중으로 어림해야할 때도 있다

 

오래된 고분들, 하나같이 둥근 풍경에 스며들다가

그저 갸륵한 숨결을 가진 것들의 따뜻한 적막을 이루면

섣불리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금긋기가 어색하다

 

수시로 모서리가 찔러대는 질곡어린 삶의 범주에서 벗어나

생명이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의 둥근 입모양과 함께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무채색 공명 같은 무덤들의 지극한 환유

 

저 시간의 연대들이 그저 둥글둥글 몸 뒤척이다가

 

 


 

강문숙 시인

1955년 경북 안동 출생. 199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과 1993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  『잠그는 것들의 방향은?』 『탁자 위의 사막』 『따뜻한 종이컵』 『신비한 저녁이 오다』 『보고 싶다』 『나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등. 대구 문학상, 대구시인협회상 등 수상. 현재 <시. 열림>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