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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명옥 시인 / 바다 갈매기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3.
안명옥 시인 / 바다 갈매기

안명옥 시인 / 바다 갈매기

 

 

다음 생에는 갈매기로 태어나고 싶다

갈매기는 천적이 없고

 

사람도 #갈매기 고기는 먹지 않고

물고기도 갈매기를 어찌하지 못한다

 

먹을 게 풍부한 곳에 살면

누구나 여유롭고 평화로워지는 법

 

갈매기는 유머가 풍부하다

오늘도 새우깡을 따라 날아다닌다

 

욕망으로 크는 나무들의 숲을 버리고

빛과 소금이 있는 바다를 선택해 사는 건

 

사표를 의논 없이 냈다고 아내는 소 닭 보듯 해

죽으러 온 바다가 살게 하는 바다가 된 사내 내력을

 

바다의 경전으로 읽는 밤

뼛속까지 비워 낸 갈매기처럼

 

바닷속에 있어도 짠물에 젖지 않는 몸

물을 털어내면 그뿐 다시 날개를 펴고

 

지금 딱 견디기 좋은 시간이야

고공에서도 담숨에 낚아채는 사냥꾼으로 거듭나고

 

바다에서 빠져 죽은 영혼들이

갈매기로 태어나

부둣가에서

비가 오면 차분하게 앉아있다

 

 


 

 

안명옥 시인 / 놓쳐버리다

 

 

여학생들은 생기 발랄 당당하고

꿈으로 치마를 채운다

나는 그 여학생을 놓치고

스물다섯에 결혼을 하고 시집살이 하는 동안 신혼을 놓쳐버리고

엄마로만 사는 동안 여자를 놓쳐버리고 나를 놓쳐버리고

웃어야 할 때를 놓쳐버리고

 

남자들은 그 좋은 시절 그 일을 했더라면 한다는데

여자들은 그때 그 남자를 놓쳐버린 것을 후회 한다나

법대생을 놓쳐버리고 항공학과 생을 놓쳐버리고

놓아야 할 것들만 남아

100세를 살게 되나보다

어쩌자고 그때 사범대를 가지 않아 연금을 놓쳐버려

헐렁해진 치마에 바람이 분다

 

모처럼 뒤풀이에 참석하다가 막차를 놓치고

문학 강의 하러 가는 아침 버스를 놓치고

놓칠 건 놓쳐도 놓쳐선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새해마다 엄마를 보러 가는 것을 일순위로 잡고도

놓치거나 미루며 살고

나는 그 무엇인가가 놓친 잉여로 남았다

 

엄마의 장 담그는 법을 놓치고

미역국 먹어라 엄마 전화가 끊어지자 내 생일날을 놓치다가

페이스북 이력을 보고 친구들이 챙겨주는 생일

나는 음력을 쇠는데 이참에 생일을 바꿀까

봄맞이꽃이 피었다 져도 심장 두근거리는 것을 놓치고

놓칠 게 나밖에 없다

 

놓치지 않아야 할 그 무엇을 찾아 눈을 부릅뜨는데

문득 내 시집을 내주고 밥 한 번 먹자 약속해놓고

느닷없이 봄날 세상을 떠난 사람이 생각난다

약속을 놓쳐버린 사이,

그가 놓친 이 봄에 꽃은 핀다

나는 무엇을 그 무엇은 또 나를 놓치는가

 

 


 

 

안명옥 시인 /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박새 한 마리 비에 흠뻑 적은 채 먹이를 찾고 있다

양쪽 날개를 가끔씩 털어보지만

날개는 자꾸 밑으로 처진다

 

애비 없는 자식 만들지 않으려고 견뎠어

 

땅바닥에 추락하여 울먹이는 박새 한 마리

다치고 상한 날개 위로

두려움이 덮치고

어둠을 우려낸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검다는 건 시작이라는 것

검다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세상의 모든 감정을 섞은 색이 검은 색이라는 것

 

바닥에 넘어지면 바닥을 짚고 일어서듯

바닥을 쳤으니

이젠 날아오를 일만 남았나

 

-시집 <뜨거운 자작나무 숲>에서

 

 


 

 

안명옥 시인 / 모과

 

 

땅의 살이 굳어지면

길이 된다

 

많이 밟힐수록

좋은 길이 된다

 

어머닌 굳은 손으로

뜨거운 냄비를 덥석 집어 올리나

난 아직 뜨거운 밥그릇 하나 들지 못한다

 

굳는다는 건

수많은 길들이 내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것

 

책상 위 모과가 굳어가면서

향기가 더 진해지고 있다

 

 


 

 

안명옥 시인 / 자작나무 숲

 

 

어둠은 포근해서 좋다

먼 길을 걸어왔지만

뜨거운 짐승처럼웅크린

자작나무 숲이어서 오래 걷는다

 

추운 곳에서 자라는 습성을 가진 자작나무

젖어서 더 활활타 오른다지

축축해진 길바닥에 눕는 달

 

어둠의 자식들일수록 눈빛이 살아 있다

 

 


 

 

안명옥 시인 / 양파

 

 

여자만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양파 몸을 벗길때마다

양파는 나 대신 운다

 

미끌미끌한 것은 양파의 유머다

요리조리 빠져나가려는 양파의 자유다

 

양파는 칼날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수많은 실핏줄을 감추고

 

몸 속 깊이 자궁을 숨기며

파란 싹을 피워내고 있다

 

양파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해맑은 표정 속

매운 향기가 쟁여있다

 

연애 한번 하자고 옷을 벗기다가

내 속을 들여다보고

당신은 자꾸 울었다

 

 


 

 

안명옥 시인 / 발칸산맥의 장미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수는

발칸 산맥의 장미에서 나온다

 

자정에서 새벽 2시 사이에 딴

장미로부터

 

장미가 최고 향을 뿜어내는 시간은

가장 춥고 어두운 시간

 

내가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스스로 위대해졌다

 

 


 

안명옥 시인

2002년 《시와 시학》 봄호로 등단. 성균관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한양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수학. 시집 『칼』 『뜨거운 자작나무숲』 『달콤한 호흡』. 서사시집 『소서노召西奴』, 장편  서사시집 『나, 진성은 신라의 왕이다』. 창작동화 『강감찬과 납작코 오빛나』, 동화 『금방울전』 『파한집과 보한집』, 역사동화 『고려사』. 성균문학상, 바움문학상 작품상, 만해 ‘님’ 시인상 우수상, 김구용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