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명옥 시인 / 바다 갈매기
다음 생에는 갈매기로 태어나고 싶다 갈매기는 천적이 없고
사람도 #갈매기 고기는 먹지 않고 물고기도 갈매기를 어찌하지 못한다
먹을 게 풍부한 곳에 살면 누구나 여유롭고 평화로워지는 법
갈매기는 유머가 풍부하다 오늘도 새우깡을 따라 날아다닌다
욕망으로 크는 나무들의 숲을 버리고 빛과 소금이 있는 바다를 선택해 사는 건
사표를 의논 없이 냈다고 아내는 소 닭 보듯 해 죽으러 온 바다가 살게 하는 바다가 된 사내 내력을
바다의 경전으로 읽는 밤 뼛속까지 비워 낸 갈매기처럼
바닷속에 있어도 짠물에 젖지 않는 몸 물을 털어내면 그뿐 다시 날개를 펴고
지금 딱 견디기 좋은 시간이야 고공에서도 담숨에 낚아채는 사냥꾼으로 거듭나고
바다에서 빠져 죽은 영혼들이 갈매기로 태어나 부둣가에서 비가 오면 차분하게 앉아있다
안명옥 시인 / 놓쳐버리다
여학생들은 생기 발랄 당당하고 꿈으로 치마를 채운다 나는 그 여학생을 놓치고 스물다섯에 결혼을 하고 시집살이 하는 동안 신혼을 놓쳐버리고 엄마로만 사는 동안 여자를 놓쳐버리고 나를 놓쳐버리고 웃어야 할 때를 놓쳐버리고
남자들은 그 좋은 시절 그 일을 했더라면 한다는데 여자들은 그때 그 남자를 놓쳐버린 것을 후회 한다나 법대생을 놓쳐버리고 항공학과 생을 놓쳐버리고 놓아야 할 것들만 남아 100세를 살게 되나보다 어쩌자고 그때 사범대를 가지 않아 연금을 놓쳐버려 헐렁해진 치마에 바람이 분다
모처럼 뒤풀이에 참석하다가 막차를 놓치고 문학 강의 하러 가는 아침 버스를 놓치고 놓칠 건 놓쳐도 놓쳐선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새해마다 엄마를 보러 가는 것을 일순위로 잡고도 놓치거나 미루며 살고 나는 그 무엇인가가 놓친 잉여로 남았다
엄마의 장 담그는 법을 놓치고 미역국 먹어라 엄마 전화가 끊어지자 내 생일날을 놓치다가 페이스북 이력을 보고 친구들이 챙겨주는 생일 나는 음력을 쇠는데 이참에 생일을 바꿀까 봄맞이꽃이 피었다 져도 심장 두근거리는 것을 놓치고 놓칠 게 나밖에 없다
놓치지 않아야 할 그 무엇을 찾아 눈을 부릅뜨는데 문득 내 시집을 내주고 밥 한 번 먹자 약속해놓고 느닷없이 봄날 세상을 떠난 사람이 생각난다 약속을 놓쳐버린 사이, 그가 놓친 이 봄에 꽃은 핀다 나는 무엇을 그 무엇은 또 나를 놓치는가
안명옥 시인 /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박새 한 마리 비에 흠뻑 적은 채 먹이를 찾고 있다 양쪽 날개를 가끔씩 털어보지만 날개는 자꾸 밑으로 처진다
애비 없는 자식 만들지 않으려고 견뎠어
땅바닥에 추락하여 울먹이는 박새 한 마리 다치고 상한 날개 위로 두려움이 덮치고 어둠을 우려낸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검다는 건 시작이라는 것 검다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세상의 모든 감정을 섞은 색이 검은 색이라는 것
바닥에 넘어지면 바닥을 짚고 일어서듯 바닥을 쳤으니 이젠 날아오를 일만 남았나
-시집 <뜨거운 자작나무 숲>에서
안명옥 시인 / 모과
땅의 살이 굳어지면 길이 된다
많이 밟힐수록 좋은 길이 된다
어머닌 굳은 손으로 뜨거운 냄비를 덥석 집어 올리나 난 아직 뜨거운 밥그릇 하나 들지 못한다
굳는다는 건 수많은 길들이 내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것
책상 위 모과가 굳어가면서 향기가 더 진해지고 있다
안명옥 시인 / 자작나무 숲
어둠은 포근해서 좋다 먼 길을 걸어왔지만 뜨거운 짐승처럼웅크린 자작나무 숲이어서 오래 걷는다
추운 곳에서 자라는 습성을 가진 자작나무 젖어서 더 활활타 오른다지 축축해진 길바닥에 눕는 달
어둠의 자식들일수록 눈빛이 살아 있다
안명옥 시인 / 양파
여자만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양파 몸을 벗길때마다 양파는 나 대신 운다
미끌미끌한 것은 양파의 유머다 요리조리 빠져나가려는 양파의 자유다
양파는 칼날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수많은 실핏줄을 감추고
몸 속 깊이 자궁을 숨기며 파란 싹을 피워내고 있다
양파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해맑은 표정 속 매운 향기가 쟁여있다
연애 한번 하자고 옷을 벗기다가 내 속을 들여다보고 당신은 자꾸 울었다
안명옥 시인 / 발칸산맥의 장미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수는 발칸 산맥의 장미에서 나온다
자정에서 새벽 2시 사이에 딴 장미로부터
장미가 최고 향을 뿜어내는 시간은 가장 춥고 어두운 시간
내가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스스로 위대해졌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박언휘 시인 / 그녀의 그림 외 6편 (0) | 2025.12.13 |
|---|---|
| 이금주 시인 / 길을 읽다 외 6편 (0) | 2025.12.13 |
| 김윤 시인 / 무너지는 서녘 외 6편 (0) | 2025.12.13 |
| 이현경 시인 / 연연한 그리움 외 6편 (0) | 2025.12.13 |
| 김규성 시인 / 오래된 악수 외 6편 (0) | 2025.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