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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신 시인 / 세례식 — 리플리컨트의 유년 우리 좋았지, 좋았었지 어제 죽은 강아지처럼 우리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따라다녔지 우리 비를 맞으며 뛰어다녔지 곤충을 채집하곤 산속에 풀어주고 왔지 바람처럼 서로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다녀와서 호흡을 나눴지 저수지에 비치는 모습 바라보며 서로에게 침을 뱉었지 물속의 숲길을 산책했지 석양은 아래턱이 부서진 채 강물을 마시고 우리 아래로 지나가는 구름과 강아지풀과 포도 나무 가져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는 강아지 눈밭을 뒹굴다가 나뭇잎을 묻혀오는 강아지 양배추를 가득 심어놓고 마을을 떠났지 걸음걸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은 아이들과 어울렸지 공놀이를 하다 보면 벽이 사라지고 집을 찾기 위해 우리 서로의 걸음을 나눠주고 더 나눠주고 가져왔지 우리 좋았지, 좋았었지 내가 보는 석양처럼 네가 보는 낮달처럼 반지를 낄 손가락을 잃어버렸지 새 떼 실밥처럼 뜯어지고
정우신 시인 / 가르기 모으기
11+3=5. 방울토마토 한 개. 방울토마토 한 개. 방울토마토 세 개. 너를 만나기 위해 몇 개의 토마토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방울토마토 한 개를 먹고 열 바퀴를 돌고. 한 바퀴를 더 돈다. 너는 동생을 위해 세 개를 남겨둔다. 동생은 방울토마토를 먹고 제자리를 뛴다.
11-0=3. 애호박 두 개. 장바구니 하나. 작년 인세 정산 금액은 392원. 대파 가격은 875원. 책과 대파를 팔아도 된장국에 호박을 넣을 수 없다. 나는 호박도 없고 된장도 없고 미소만 있다. 나는 아이를 보기 전에 웃는 연습을 한다.
5+1=2. 다섯 개의 손가락이 달린 한 손. 손가락 한 개.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선 주머니에 한 손을 얼른 넣는다. 그 사람이 나의 손가락 개수를 셀 것 같아서. 앞으로 내가 하는 모든 말에 증명이 필요하게 될 것 같아서. 2-5=?. 허니버터칩. 코카콜라. 가나초콜릿. 목캔디. 쵸코하임. 오징어 짬뽕. 2학년 5반 선생님 생일은 7월 8일, 7월 8일은 내 생일, 문방구에서 김일성 사망 소식이 들려서 친구들이 선물을 사주려다가 만다. 구의역 9-4에서 다시 시작.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자리를 바꿔도 몇 개의 방울토마토가 열리고 한 사람을 위한 된장국은 끓어갈 것이다. 나의 삼위일체는 부모와 부부와 부채. 시간이 돌고 돌아 서로의 방에 들어가 슬픔의 이불을 가지런히 펼 때까지 참사가 계속되는 것이 신이라면.
라일락과 라벤더가 섞이고 있음에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세계라면. 그것이 하필 머릿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라면. 아빠 아빠, 우리는 이제 무엇을 가르고 모아야 할까.
-계간 『상상인』 2024년 여름호 발표
정우신 시인 / 번식 미나리가 자라면 미나리를 캐러 가자 칼을 쥐고 휘두르는 기분이 좋다 언젠가는 쓸모가 있을 거야 행주를 삶으며 따듯한 냄새를 모두 놓쳐버렸다 물의 폭력이란 그런 것이구나 소파에 누워 창밖을 본다 어김없는 봄은 어떤 기분으로 걸어갈까 구름이 자신의 그림자에 물을 붓듯 발등이 부풀고 차분히 자라는 것 염소는 발굽에 걸린 풀을 골라내며 울고 있다
정우신 시인 / 여름이다 -진지한 송충이 눈썹을 가진 눈사람 리플리컨트
아파트에는 더 이상 사람들이 살지 않고 육지에 나와 죽어 있는 고래의 배 속에서 키득거리는 쥐 떼 고아가 된 신들 바람의 바지에 한쪽 다리를 넣고 절룩이는데 여름이다- 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 어디로 갔을까 자신의 새끼가 잘 도망갔을까 걱정하다가 걱정하 다가 결국 목을 내줘버리는 사슴 어느 날은 갑자기 바다에 가고 싶어 회를 먹고 싶어 비가 내리면 더 좋겠지 비에 어울리는 음악이 있다면 더 좋겠지 이런 생각은 다 어디로 갔을까 염전 한편 나무 창고의 맨 구석 굵은소금에 눌어 붙어 있는 고독 조상들은 둥글게 둘러앉아 빛을 맛본다 여름이다- 진화에 실패한 오리들에게 작설차를 미래가 궁금하다면 곤충부터 배워보기를 여름이다- 백화점에는 사냥용 사슴을 끌고 다니는 눈사람 판매용 눈사람 눈사람을 타고 겨울을 여행 중이었는데 눈썹만 남았다 이건 누구의 생각일까 고층 빌딩 사이로 휘날리다 보면 직립보행이 좋았다는 생각을 한다 아유 끔찍해! 여름이다-
정우신 시인 / 안식 죽은 자의 가슴 위에 석류를 올려놓았다 지상의 한 칸에서 식어가던 그림자가 나무 그늘로 들어가 몸을 데웠다 손톱이 없는 아이들은 나무에 올라가 열매를 서로 주고받았다 빛이라는 가장 긴 못에 박혀 어둠의 심장에서 뿌리의 모양으로 말라가는 사내 석양이 호수에 눈물을 뱉어내면 분수는 슬픔을 동그랗게 밀어 올렸다 허공의 눈을 찢으며 날아가는 새 떼들 새의 눈이 얼굴 위로 쏟아지면 쥐가 달려와 안개의 떫은맛을 골라냈다 숲 속에서 아이들은 석류를 들고 망치질을 했다 말이 없는 두 발 목을 종이로 감쌌다 죽은 나무 안에 누워본다 뿌리는 어둠을 키우며 나를 뱉어낸다
정우신 시인 / 끝나지 않은 이야기
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요
감나무와 가로수와 하천을 옮겨가며 체온을 바꾸는 햇살과 바람과 걸음 소리와 기찻길을 모두 줄게요
우리 이야기를 들으며 우월해지는 사람 유전되는 사람
어느 날은 그림자가 신의 귀 같아요
신은 우리 집에 사랑과 우울을 흘려놓고
그것을 훔쳐 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그것을 죽어가는 병아리처럼 가슴에 품고 다니며
세상의 징검다리에 대해 썼어요
신은 구름으로 퍼즐 놀이를 하며 폭설을 일으키거나 무지개를 띄워놓고 긴 잠을 잡니다
우리는 새끼오리들을 옮겨주거나 물 위에 나뭇잎을 띄우고
멀리 간 바람과
우물 바닥 이끼를 향해 손가락을 뻗어보는 아주 오래된 햇살에 발등을 적셔보고
서로에게 가진 것을 모두 주었습니다
말을 잃은 당신으로부터 당신의 자식으로부터
반복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면 등이 간지러워지는 가난한 소년의 이야기가
정우신 시인 / 풀
움직이는 것은 슬픈가. 차가운 것은 움직이지 않는가.
발목은 눈보라와 함께 증발해버린 청춘, 다리를 절룩이며 파이프를 옮겼다. 눈을 쓸고 뒤를 돌아보면 다시 눈 속에 파묻힌 다리. 자라고 있을까.
달팽이가, 어느 날 아침 운동화 앞으로 갑자기 떨어진 달팽이가 레일 위를 기어가고 있다. 갈 수 있을까. 갈 수 있을까. 다락방에서 반찬을 몰래 집어 먹다 잠든 소년의 꿈속으로 덧댄 금속이 닳아서 살을 드러내는 현실의 기분으로.
월급을 전부 부쳤다. 온종일 걸었다. 산책을 하는 신의 풍경, 움직이는 생물이 없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없다. 공장으로 돌아와 무릎크기의 눈덩이를 몇 개 만들다가 잠에 든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슬픈가. 가만히 있는 식물은 왜 움직이는가.
밤이 어느 작은 마을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밤이 등 위에 정적을 올려놓고 천천히 기어간다. 플랫폼으로, 플랫폼으로, 나를 후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 창밖으로 내리는 눈발의 패턴이 바뀐다.
간혹 달팽이 위로 바퀴가 지나가면 슬프다고 말했다.
잠들어 있는 마음이 부풀고 있다.
나를 민다. 나를 민다.
정우신 시인 / 식구들
우리의 식탁에는 큰아빠와 할머니 와 고모와 고모부와 사촌 형이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다
주인 없는 컨테이너 아래에는 고양이가 산다. 사람들은 먹다가 남긴 음식을 놓아두고 간다.
여러 동물들이 모여든다.
동생은 고양이를 몰래 들고 왔다가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여러 번 그렇게 한다. 식탁 밑이 나와 동생의 자리이듯 어떤 고양이는 밥을 먹지 않고 축늘어져 있다.
사람들은 먹이를 던져주며 기쁨을 느낀다. 고양이가 어둠 속으로 깊숙이 들어갈 때까지 자세를 한껏 낮추다가 간다. 한없이 귀여워하다가도 발톱을 보이면 돌로 머리를 친다.
주인이 오면 우리는 자는 척을 한다.
현관에서 늙고 아픈 냄새가 퍼져오지만 우리는 잠바를 입고 이불을 뒤집어쓴다. 주인은 우리가 얌전히 있는 것에 대해 즐거움을 느낀다.
이리 오렴. 이리 오렴.그렇게 여러 번 침을 뱉는다.
나는 동생을 가방에 넣고 다른 동네를 다녀온다. 동생은 내가 담겼을 때의 기분을 느꼈는지 한참을 울다가도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고양이가 고양이를 공격하려다가 복종한다.
우리는 밤마다 오줌을 맞는다. 컨테이너에 불이 들어오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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