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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지혜 시인 / 어린 봄날의 사진을 읽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3.
한지혜 시인 / 어린 봄날의 사진을 읽다

한지혜 시인 / 어린 봄날의 사진을 읽다

 

 

항해도 장영군 낙도면 삼천리 세말

7살 용해야

내 눈은 너의 환영마저 가물하고 어둡구나

갓 시집간 언니 치맛자락 붙잡고 늘어지며,

따라가겠다고 울던 내 동생 용해야

북녘소식은 마비되고

네 소식을 아무에게도 듣지 못하는구나

함박웃음 부서지던 얼굴

무릎까지 쌓이던 눈밭

그 새댁 언니도 84살 할머니가 되었구나

기우는 달빛처럼 이울어지는 생각

그날처럼 흰 눈 펑펑 날리는 날,

용주언니는 너를 만나러 세말 땅으로 달려가마,

고아한 어린 햇살 같은 나의 누이야

그날, 7살 어린 너의 가슴으로 뛰어오라

 

 


 

 

한지혜 시인 / 검은 문장

 

 

비가 오는데 창문을 열었다

공기를 마시는 나무들

 

수업이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

빗발 속에서 분명 비명 소리가 났는데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은박 뚜껑을 따고 요구르트로 알약을 넘긴 뒤

은박 조각을 버렸다

 

감은 눈을 떴을 때 다리에 놓인 무거운 침목들을 올려다본다

피를 너무 쏟아내 멈춘 심장

눈 감은 내 얼굴이 낯설게 보였어

누가 나를 죽였을까 생각을 모았지만 낯선 힘은 더 강하고

생각하면 닿을 수 있는 생각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찢은 국화들이 널려 있었어

 

유리에 비쳐보이던 몇 명의 얼굴 뒤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그걸 당긴 손가락의 따뜻함을 생각해

아직도 먹먹한 가슴이 불덩이가 된 거

내 머리에 흐르던 피를 비로 지워버린 걸

 

은박지를 찢으며 아직도 숲 어딘가로 향하고 있어

숨은 날개의 빛깔은 어두워

내 몸은 어둔 침목을 밟으며 복도로 나갔지

집에 가려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어

탄환이 박히기 전까지

눈도 코도 입도 없는 허공을 올려다본다

가는 눈을 더 크게 떴을 때 하늘로 이어지는 물소리가 들려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다

 

 


 

 

한지혜 시인 / 여자와 물고기

 

 

동전만 세는 이상한 나무토막이 있다. 오톨도톨 변한 나무는 전복껍데기가 되어 있었다. 나무를 뒤집어 놓은 어둠. 그 안에 물고기들을 넣어 기르는 여자. 십년 넘도록 먹이를 제대로 먹지 못해 자라지 않는 물고기들. 물고기는 눈이 어두워져 눈이 휘저어져 바깥세상을 구경할 수 없었다. 오톨도톨 돋은 껍데기에 찔려 피투성이인 채 나무토막 안에 갇혔다. 새까만 물의 장막. 한 영상이 지난다. 새까만 나무 안에 새까만 물고기 안에 새까만 여자. 여자는 안간힘 다해 공포 위에 주저앉는다. 여자는 물고기들의 아가미를 찢어서 매일 오는 청소차에 던져버렸다. 물고기 기분 같은 건 어떨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여자는 샴푸물이 튈까봐 머리 감기던 가발을 욕조에 던졌다. 욕조 안으로 들어가 물고기의 슬픈 운명을 생각하는 여자.

 

 


 

 

한지혜 시인 / 물병

 

 

물은 보이지 않는 미래로 걸어갔다

 

꽃도 따라 걸었지만

병 속에 통로는 없어서 갇힌 물은 꽃을 외면했다

 

낯선 물에선 꼬리가 끊어졌다

 

물에 놓인 다리로 물들은 다리를 건넜다

꽃도 따라 걸었다

 

잠적해 있던 평온이 분출하는 물줄기

 

나는 자주 노래를 불렀다

 

물에서 꽃들은 딱 한번 자줏빛 다발로 다시 태어났다

 

 


 

 

한지혜 시인 / 고동의 껍질

 

 

고둥의 껍질을 만진다

 

그것은 컴퓨터 자판처럼 누구에게나 간섭을 받는다

거의 컴퓨터를 끼고 사는 한 남자는

고둥의 껍질을 먹고

고등의 껍질 속에서 살아

기거충이라 불렸다

고둥 껍질 속에 있지만

고둥이 아닌

 

기거충,

 

으로 사는 남자가 창과 출입구를 막았다

껍질 속에서

게임과 만화를 먹다가

껍질이 열리면 밖으로 나와 돌아다녔다

다시 껍질이 닫히려하면

 

껍질 속으로 돌아오는 남자

 

간간히 껍질에서 나와

 

물 한 컵 마시거나

아내 몰래 홍초를 들이키는 남자의 긴 목

 

 


 

 

한지혜 시인 / 중력

 

 

 3리터 물을 들이마셨어도 물 한 방울 새어나오지 않는다

 볼록해지는 몸?

 두드려본다

 

 태양이 사라진 지구일까 힘이 없어진다 구름? 사방이 안 보인다 서로 끌어당긴다 발효? 내가 먹어댄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시간이 흐른다 물 한 방울씩 젖어드는 공간? 출렁인다 8분후 태양궤도를 벗어나는 지구, 몸? 무중력 아무것도 없다 소우주가 정지된다 아래로 힘을 받고 있다 서로 끌어당긴다 흐르는 물, 빛이 휘어진다 직진이다 너무 휘어진 시공간에서 떨어진다 블랙홀 백조자리, 구름? 질량들이 떨어진다 가속을 받는다 내가 먹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시집 『모든 입체들의 고독』 2016. 문학의전당

 


 

 

한지혜 시인 / 나는 큰 나무가 되고 싶다

 

 

나는 바람에 맞은 빰을

쓰다듬으며

한 아름의 젊음을 묻는다

 

그래서 난 가끔

산과들 그리고 공원을

산책하며

자신의 공간만 차지하고

믿음직스럽게 버젓이

서 있는 나무를

희망찬 눈길로 바라본다

 

이렇게 믿음직스럽게

서 있는 나무는

신생의 빛깔로

머 언 어둠의 끝에서 오르는

아침을 통해

나뭇잎이 몸을 흔들면서

생명을 부르는 소리도

들려주고

머리 드는 꽃바람 속에서

푸른 머리 풀어 헤치며

정겨운 새들을 불러들여

아름다운 새들의

노래소리도 들려주고

가슴속 고이 담아둔 단 젖을 모아

사랑스런 열매를

풍성하게 듬뿍 만들어

내준다

 

나는 어디라도

좋은 곳에 하나의 큰 나무가 되어

기도가 남은 자리에

무수히 물든 평화의 하늘빛

긴 치마자락으로

이 강산 골골마다 울리도록

뜨거운 가슴으로 노래하며

모든 이에게 사랑을

나누고 싶다

 

그리운 마음이

아무리 깊어도

슬픈 꿈에 가슴이 젖어 와도

어두울 때

폭풍 속에서도

눈보라 속에서도

괴로워 신음 할지라도

결코 피하지 않는

큰나무가 되어

살아 있음이 눈물겨운

아름다운 삶에

소망의 눈빛 솟아 올리며

무수한 음향으로

하늘을 열리고 싶다

 

바람에 맞은 빰을

쓰다듬으면서까지

한아름의 젊음을 묻은

나무의 인고의 삶을 본받아

나는 큰 나무가 되고 싶다

 

 


 

한지혜(韓智慧) 시인

인천광역시 대청도 출생. 아호는 초우(艸友), 또는 운서(雲瑞), 1980년 월간 《신세계》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마음에 내리는 꽃비 』 『차와 달의사랑노래』 『두 번째 벙커』 『모든 입체들의 고독』 『저녁에 오는 사물들』. 2014년 시흥시문화예술발전기금 수혜. 갯벌문학 작가상 수상. 불교문인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시산맥시회 특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