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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규 시인 / 아내가 없는 날
누군가 그리워하기 위해 지금 나는 쓸쓸해진다
슬픔에 취해 너를 부른다 지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너를 그리워하는 나를 위해 너는 지금 쓸쓸하다
쓸쓸한 너를 위해 지금 나는 그리워한다
이미 우리는 쓸쓸하다 쓸쓸할 것이다
이복규 시인 / 서른에게
소리에 예민한 칼 언제나 낯선 얼굴 서른 서른 껍질을 깎고 깎으면 남는 게 없는 서른, 죽음에 가까운 누구나 한번쯤 피묻은 서른을 꺼내 면도를 한다 푸른 속살 사이로 보이는 어설픈 흰 꿈들 이제야 미워하며 잘라낸 어둠들 주섬주섬 모아 물결에 씻어 보낸다 어두웠으므로 더 선명했던 서른
-시집 「아침신문」 2013년 지혜
이복규 시인 / 나는 자주 운다
영화 「비 그치다」에 무사가 등장하여 칼은 '자신의 바보 같은 마음을 베는 것'이라고 한다
좋은 칼일수록 칼집의 고요가 깊고 칼집의 침묵이 깊을수록 칼은 빛난다
어둠 속에 감춰진 그 빛만으로 무사는 칼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
다만 칼집의 울음만으로 상대의 바보 같은 마음을 벤다
-『거제통영 오늘신문/시를 걷는 오늘』 2018.07.27.
이복규 시인 /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
학교 등나무 그늘 밑 콘크리트 갈라진 틈 사이 금잔화가 피었다 조금 갈라진 틈만 있으면
꽃은 핀다
그러나 꽃을 피게 하는 것은 햇빛도 물도 아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그 틈으로 뛰어드는 용기 때문이다 그 틈 사이로 뛰어드는 용기는 꽃의 꽃들의 오랜 명령
꽃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려 하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 꽃을 피우려 죽음을 무릅쓰고 꽃을 피우려할 뿐
이복규 시인 / 시월
네가 떠나고 다시 볼 수 없을 때 나는 함양에 갔다고 할 것이다 함양시장 입구 황태해장국집 지나 가을볕에 꼬들꼬들 잘 마른 할머니들이 내놓은 산약초 좌판을 지나 병곡순대 집에 갔다고 할 것이다
오다가 진주 중앙시장 사거리 리어카에 튀김옷 입고 끓는 기름에 정갈하게 몸을 눕힌 새우와 고추를 한입 물고 골목 안 제일식당을 지나 하동집에서 양은냄비에 졸복 지리 한 그릇 먹고 왔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어디로 갈지 몰라 서성거리다가 해질녘 남강 둔치에서 유등을 한참이나 보았다고, 축제마다 떠돌던 각설이들 다 팔아도 남는 것도 없던 사람들 등 뒤로 해 지는 남강을 바라보며
거제로 돌아와 처음 신혼살림을 차렸던 능포, 새마을식당 지나 어린 딸을 업고 해풍을 잠재웠던 방파제에 앉았다가, 낚시꾼에게 오늘 무슨 고기가 많이 잡히냐고 물어 보았다고 말할 것이다 텅 빈 어망에 내 마음 머물렀다고
십월의 비읍이 바람 따라 사라진 시월, 세월
-시집<사랑의 기쁨>에서
이복규 시인 / 퇴근
집으로 갈 때쯤이면 슬픔이 가볍다
슬픔이란 슬픔을 다 써버려 슬픔이 남아 있지 않다
슬픔이 맑다
슬픔이 맑다고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자, 이제 집으로
이복규 시인 / 백제는 쓸쓸하다
하루 종일 컴퓨터 바둑이 유일한 낙인 여든이 넘으신 장인
여든이 넘었다는 말에는 언제나 죽음의 냄새가 난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 처음 들어갔던 백제 무녕왕릉은 죽음의 무섭고도 화려한 빛이 가슴을 찔렀다
부여가 고향인 장인어른의 바둑판에는 언제나 마지막일지 모르는 사석이 누워있다
폐렴이 스치고 간 장인의 깊은 기침소리는 백제의 쓸쓸함이 담겨 있다
장인의 눈빛에는 인생의 무의미함이 언제나 있었지만 결코 나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장모님은 언제나 기도로 그 답을 대신했다
추풍령 처갓집을 다녀오는 날은 어김없이 바람이 따라와 등을 돌렸다
불을 끄고 누우면 아내의 깊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물은 스스로 깊어지고 나무는 스스로 꽃을 피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는 봄 그림자가 우리 언저리에서 행복이 불행을 불행이 행복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꽃봉오리가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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