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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시인 / 백비를 읽다
적막을 저어가는 물이랑을 보았다 꿈이거나 꿈이 아닌 어딘가를 서성이며 손대면 금세 화르르 타오를 것만 같은 고요 도대체 그 너머엔 무엇이 있는 걸까 사라진 시간들은 어디로 가 쌓이고 흩어진 살과 혼들은 또 무엇이 되었을까 물과 돌 바람의 땅 골골마다 휘저어 세상 밖 그 무엇을 찾으려고 했을까 머리 푼 옛 곡비처럼 억새 떼는 몰려오고 어둑발 차오르는 허공의 난간들이 그믐의 벽화 속처럼 저물어간 저녁 무렵 파도는 제 몸속 흰 넋들을 왈칵왈칵 쏟고 있다 -계간 『다층』 20224년 겨울호 발표
황인찬 시인 / 면역
냉장고에 붙여 놓은 자석이 힘없이 떨어졌다 눈을 껌뻑이는 거북이가 수조 밖에 나와 있었다 그것을 보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 버렸어 그렇게 생각했다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베란다의 바닥이 젖어 있었다 상관하지 않고 옷도 벗지 않고 소파에 누웠다 누가 앉았다 간 것처럼 따뜻했는데 구독하지 않는 석간신문이 테이블 위에 있었고 이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야 돌이킬 수 없다는 건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야 집에 돌아왔는데, 여기서는 아무도 비참하지 않았다 침실에 들어서자 잎이 무성한 선인장이 있었다
-시집 <구관조 씻기기>에서
황인찬 시인 / 물의 에튜드
혼자 집에 앉아서 물을 마셨다 한 번 마시면 멈출 수 없었다 물 없는 물병이 쌓여 갔다 여긴 다 마신 물병이 하나 둘 셋 열 열둘 스물 세는 일을 그만두자 물의 얼굴이 여길 본다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잘 알진 못하겠다 물의 질긴 표면이 이곳을 좋아하는 게 느껴졌다 * 아무도 없는 집이 심심했다 말 걸어 주는 사람도 없고 살아 있는 사람도 없었다 모든 것이 물의 표면에 고정된 것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물속은 조용하구나 그래도 목은 마르다 그렇게 중얼거렸는데 지금 말한 건 누구?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혼자 집에 앉아 있으면 나는 자꾸 물이 마시고 싶다 자꾸 물을 마신 걸 까먹게 된다 계속 물을 마셔야지 언제까지 마셔야 할까 모르겠어 일단 마셔 이건 또 누구의 중얼거림일까 나는 계속 물병을 비우면서 집을 나왔다
-시집 <구관조 씻기기>에서
황인찬 시인 / 퇴적해안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어릴 적 보았던 새하얀 눈밭
살면서 가장 슬펐던 때는 아끼던 개가 떠나기 전 서로의 눈이 잠깐 마주치던 순간
지루한 장마철, 장화를 처음 신고 웅덩이에 마음껏 발을 내딛던 날, 그때의 안심되는 흥분감이나
가족들과 함께 아무것도 아닌 농담에 서로 한참을 웃던 날을 무심코 떠올릴 때 혼자 짓는 미소 같은 것들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런 것들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을 하는 되는
평범한 주말의 오후 거실 한구석에는 아끼던 개가 엎드려 자기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얘가 왜 여기 있어 그럼 지금까지 다 꿈이야?
그렇게 물었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개만 엎드려 있었다
바깥에는 눈이 내린다
나는 개에게 밥을 주고 오래도록 개를 쓰다듬었다
황인찬 시인 / 물가에 발을 담갔는데 생각보다 차가웠다 그러나 아무것도 해명된 것은 없다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일상을 위해 무고한 한 명의 아이를 영원히 지하실에 가두는 어떤 도시에 대해서, 거대한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 소규모의 폭력을 준비하는 늙은 소설가와 건축가에 대해서, ‘외로운 마음’이라는 이름을 걸고 신문 상담란을 운영하며 신앙을 잃지 말라는 답변을 해주는 삶에 지친 어떤 남자에 대해서
가끔은 슬픈 목소리로, 또 가끔은 즐거운 목소리로, 중요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이건 정말 중요한 이야기야, 이건 정말 있었던 일이야 강조하고 또 강조하면서……
그러나 나는 네가 왜 소설 속의 일을 정말이라고 말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또 너는 말했다
홀로 지내던 날들과 준비 없이 떠난 여행과 한낮의 물가에서 보았던 반짝이는 돌들에 대해, 그리고 갑자기 흘러내리던 까닭 모를 눈물에 대해
죽기로 한 사람이 물속에서 눈을 뜨면 보이던 것에 대해
지금 너는 내 옆에 죽은 것처럼 누워 있다 나는 네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겠지 이것은 정말 일어났던 일을 적은 것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밖으로 나가니 이미 저녁이었다
저녁의 불빛 아래로 물가도 돌도 없는 서울의 언덕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이 모든 일을 언젠가는 다 적어야겠다고, 그러나 사실로는 적지 않아야겠다고 그런 생각 속에서 있었던 일은 끝이 난다
황인찬 시인 / 피카레스크
시골에 있는 나의 작은 집에서는
조용히 양파를 까는 저녁과 흐르는 물에 그릇 부시는 소리 가득한 오후와
겪어본 적 없는 아름다운 삶이 자꾸 제작되고 있다
슬픔이 찾아오는 날에는 일기를 썼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 소설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고백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계속 고백하다보면 진실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여기서 그는 나와 오래 함께 살았다
그는 화단에 가득 피어난 꽃들이 다 죽은 것을 보며 여름 내내 울었다
그는 어두운 시골길을 지나 이곳으로 오는 사람이다
아직은 오지 않았다
황인찬 시인 / 유독
아카시아가득한 저녁의 교정에서 너는 물었지 대체 이게 무슨 냄새나고
그건 네 무덤 냄새다 누군가 말하자 모두가 웃었고 나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어
다른 애들을 따라 웃으며 냄새가 뭐지? 무덤 냄새란 대체 어떤 냄새일까? 생각을 해 봐도 알 수가 없었고
흰 꽃잎은 조명을 받아 어지러웠지 어둠과 어지러움 속에서 우리는 계속 웃었어
너는 정말 예쁘구나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예쁘다 함께 웃는 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는데
웃음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어 냄새라는 건 대체무엇일까? 그게 무엇이기에 우리는 이렇게 웃기만 할 까?
꽃잎과 저녁이 뒤섞인,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너는 가장 먼저 냄새를 맡는 사람, 그게 아마
예쁘다는 뜻인가 보다 모두가 웃고 있었으니까, 나도 계속 웃었고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안 그러면 슬픈 일이 일어날 거야, 모두 알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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