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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 시인 / 아랫목의 순례자들
배꼽 밑이 달아올라요. 윗목은 뒹굴뒹굴 형의 차지, 커서 훌륭한 인물이 되라고 엄마는 말했어요. 팬티가 지겨워, 팬티가, 엄마, 창밖에 눈 내리는데, 무말랭이가 보아뱀 허물처럼 널려 있는데, 크면 꼭 빤스 입은 슈퍼맨이 돼야 하나요. 세상의 꼭대기에서 날아다녀야 하나요. 벽에 붙은 할머니 똥을 떼둣 엄마가 복권을 박박 긁어요. 이건 얘야. 마법의 사다리야, 사다리 위는 대박. 아래는 지옥, 쉬운 이치지? 이치는 처음 듣는 말, 외우려고 이 이 이 난 사타구니가 긁고 싶어졌고, 치 치 기차놀이 꿈꾸는 형이 침을 뱉어요, 거짓말, 천국은 차가워, 고 투 헬 고 투 헬, 주워들은 단어를 중얼대며 형이 아랫목을 노려요, 이리 오렴 얘들아, 할머니가 마귀할멈처럼 킬킬대요, 엄마, 따스한 불가마는 정말 지옥에 있나요, 나도 할머니처럼 아랫목에 내려가 살아야 하나요
박강 시인 / 몽마르트르
흑인 악사의 광장 짧은 시가 유행인 겨울이 오면 돌계단은 기지개 켜며 일어선다 접힌 그림엽서의 귀에 대고 노래 부르는 새들
하얀 집들의 굴뚝을 오르락내리락 봉고차가 물감처럼 아이들을 풀어놓는다 고양이 등을 쓰다듬는 구름이 한 아이를 붙잡고 귀 자른 자와 독주 마신 자의 이야기를 속삭여주기 위해
배고픔, 얘야, 그건 무엇도 아니지 혁명 뒤에 이 언덕은 널 버린 햇살을 찾아 마다가스카르로 떠날 거야 그때까지는
잠든 해바라기의 태엽을 감는 종소리 성탑 계단을 베고 눕는 악사 곁에서 봉주르? 가끔씩 찾아오는 아침
박강 시인 / 오늘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얼굴로
잠시 눈을 감고 서기로 한다 칠포, 정자, 주전 반짝이는 해변들의 길이는 어차피 상대적인 것 벨트 푼 바지로 출렁대는 비릿한 파도의 포말이 벌써 반생도 남지 않게 된 내 삶의 몇 걸음 앞에서 수평선 쪽으로, 몰래 썰물로 뒷걸음질 치다가 녹슨 등대들의 유언을 모으려 귀를 세우다가 그것은 한때 중얼거리는 오후의 한때를 나는 보내고 있다 그것은 자유 더는 꿈이 사라진 자유 그것은 더는 누구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않게 된 바다 날카로운 이빨을 감추고 입을 꾹 다문 수평선의 바다 산소 호흡기처럼 소라고둥에 입을 대고 외쳐 보아도 식칼 든 수평선 뒤로 좀처럼 물러서지 않으려는 결기의 바다 모래알처럼 창백한 얼굴로 오늘도 나는 밀물로 뒤바뀌는 시간을 기다린다, 오늘도 해변에 서 있는 건 느닷없이 밀려와 내 발목을 잘라내고 상대적인 만큼 나보다 큰 키의 여인을 사랑하기 위한 것 내 무릎까지 싹둑 잘라내고 억지로 키를 맞추어 볼품없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 다가오는 것 첫 신호의 바다 그러고 보니 아직 반생이나 남았더군 죽여달라고 지겹게 중얼거리는 나를 향해 쏴아쏴아 파도로 칼을 갈며 다가오는 바다
* 프로크루스테스 :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엘레오시스 근처에 살았던 도둑. 그는 자신의 침대에 사람들을 눕힌 뒤 침대의 길이에 맞게 사람의 다리를 늘이거나 잘라낸 것으로 유명하며, 후에 테세우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박강 시인 / 박카스 만세
1 작은 병 하나를 응시하며 나는 태어났다 사각 모양의 단순한 선물들이 척척 쌓였다 고생했어 축하해 소리를 남기고 간 사람들은 그러나 다시 오지 않았다
2 엄마 손에서 약병은 피를 쏟아내듯 따다닥 이빨 가는 음악을 들려주었다
3 제 속을 비워낸 병에 며칠 후 엄마는 조용히 꽃을 심었다 바라보았다
4 내 머리에서 꽃이 자라고 자꾸 잇몸이 가려울 무렵 혼자 놀던 지붕 위 톱니 빠진 태양의 바퀴가 서쪽으로 굴러갈 무렵
5 밤이면 앓던 할머니가 늘 손에 쥐고 산 건 무엇이었을까 다닥다닥 빈 병들이 모여 산 양철 지붕에서
6 새벽에 그녀의 손이 허공을 그으며 힘없이 풀어졌다 또르르 구른 병에서 흐른 노란색의 액체가 이부자리를 적셨다 오줌 싼 줄 안 나는 울 수 없었다
7 갈수록 홀쭉해지는 어깨 자꾸 엄마의 몸은 병을 닮아갔다 엄마 그날의 피로는 그때 그때 풀어요 저처럼 졸업식장 뒷산에서 나는 담배를 피웠고 빈 병에 엄마의 손처럼 꾹꾹 새까만 재를 쌓아갔다 8 사람들 머리에서 선인장 가시가 돋을 때면 나는 잠시 엄마의 꽃을 빼고 빈 병에 코를 댄다 사막의 바람 냄새가 훅 풍겨온다
박강 시인 / 2013년 봄 박민규
까맣게 타들어 가는 눈빛들에 기대어 살았다.
묶어 놓고 보니 지난 십 년 삼십 대의 기록이 되었다.
타오르는 음들, 외침들, 무한히 반복되는 밤.
문학은 한번은 반드시 인간에 대한 의견이다.
삼십 번후에 시작(時作)은 습기에 젖고 사람은 황폐해 버려도 시인은 자기의 병을 모른다.
박강 시인 / 어김없는 낮잠
나는 낮에 쉰다, 움직이는 것들을 정지시키기 위하여 끝장내기 위하여, 그것은 한때의 철없던 꿈 부끄럽지 않은 시인이 되는 꿈
북상의 궤적을 만들어 내려 애쓰는 남태평양의 작은 태풍에게도 꿈은 있지 예상 가능한 것들은 낮에 움직이므로 그 중심에서 구름들에게 속삭이는 난류의 바다가 되는 것 휘몰아치는 목소리가 되는 것
오늘도 낮에 쉬면서 나는 이 거리에서 소용돌이치는 것들을 보고 있다, 모두가 그물에 잡혀 놀란 물고기 눈빛 살려거나 발버둥치거나 그것은 잠깐 도마 위에서 토막 나는 것도 잠깐
밤마다 악몽 속에서 잠깐씩 나는 잠을 이어갔고 충혈된 눈으로 새벽을 마주했다, 빛의 그물이 온 세상에 던져지고 건져 올려진 사람들이 어딘가로 운반될 때
그물코 사이로 용케 빠져나온 게 나라면 자유롭게 바다를 헤엄쳐온 게 나라면 꿈을 꾸고 이룬 삶, 하나 오후마다 왜 이렇게 졸리고 슬픈가 햇살은 사람들의 고통을 덮어주는 마취제 왜 나에게만 가혹한가
북상의 궤도 속에서 지느러미를 다친 모양이야 심해의 바닥으로 나는 추락하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오는 낮잠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고 배를 들어내고 눈을 감는다
박강 시인 / 비 내리는 바다는 자꾸 얼굴을 만든다
오랫동안 나는 철없이 가벼웠던 영혼 떠 있으면서 방에 갇히기를 거부한 한 줌의 먼지 오늘도 먼지처럼 저녁마다 남겨 놓은 맥주 거품과 거품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단조로운 식탁 한켠에 거울에 세 들었던 성에가 쫓겨나고 있다 멀건 죽으로 흘러내리며 거울의 먼지를 씻어낸다, 눈물처럼 결국, 눈물처럼 오늘도 기억해 내지 못한 여인들 하얀 구두는 누구였더라 하얀 발목은 누구였더라 스쳐 지나간 이름 없는 여인들처럼 가장자리부터 떨어지는 이 겨울 나뭇잎을 본다, 신맛의 이불을 자꾸 펼치며 잠을 재촉하는 아내를 본다, 그녀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주말마다 바다 저편에서 몰려오는 납빛 구름을, 신발 끈 조이며 잰걸음으로 탈출을 서두르는 자들의 얼굴을, 어류의 알처럼 산란하는 빛을 가두며 수용소를 짓기 시작한 바다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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