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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향미 시인 / 보는 것을 보는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4.
김향미 시인 / 보는 것을 보는가

김향미 시인 / 보는 것을 보는가

 

 

코끼리야, 내가 부르는 코끼리는 늘 코끼리였으나

오늘 부르는 코끼리는 코끼리가 아닌 코끼리 그 외

어쩌면 나와 코끼리를 제외한 그 모든 밀림,

 

코끼리야, 부르고 내가 바라보는 곳은 창밖 잔 나뭇가지 사이에 내린

햇살이거나 유리창에 두껍게 코팅된 노랑 시트지, 바라보는 것들이

나와 하나가 되거나 나의 일부가 되는 순간이 스쳐가고

 

따라해, 걸어봐 봄이니까 지금

발음이 정확한 하하하, 이건 내게 말 걸어오는 나의 외부

머리가 웃으니 何何何, 머리를 지우고 웃기도 한다 好好好 웃고 나니까

코끼리가 대답이 여전히 없다

어디선가 하하하, 호호호

 

-『예술가』 2016년, 봄호, 통권 제24호)

 

 


 

 

김향미 시인 / 바다낚시

 

 

  사위가 어두워지면 불 밝히는 바다, 사각의 화면 앞을

  생쥐 한 마리 바쁘게 움직인다

  먹지 않아도 배부른 미끼

  제 향기 닮은 떡밥을 찾아 클릭클릭

  남의 창고를 뒤지기 시작하는 소리 그치지 않는다

  신중하게 골라 훔쳐온 미끼를 안고

  그는 밤바다로 나아간다.

 

  고요한 물결 위에 미끼를 내린다. 가만히 떠서 깜빡이는 찌를 팽팽한 시선으로 노려본다. 잘 버무려진 미끼를 달고 물속으로 던져진 미늘, 가시를 감싼 향기가 퍼지면 물 속 깊은 곳을 유영하는 물고기들 몇 마리쯤 그 향기에 끌려 올라올 것이다. 벌써 툭툭 건드리며 지나치기도 하고 한입 베어 먹기도 한다.

  베어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떡밥, 아래쪽에 제 꼬리를 남기고 유유히 멀어지는 익명의 유영, 아무렇게나 끊어놓은 꼬리에 찔려 그는 피를 흘린 적이 있다. 입질이 늘어날수록 더욱 부풀려진 떡밥을 들여다보며,

 

  한 마리 물고기 되기로 한다.

  만발한 향기에 끌려 사각의 바다로 뛰어든 그의

  살림망, 비어있는 그물 사이로 흐르는 물결에

  핏발 선 눈. 헛배가 부르고 때늦은 멀미를 한다.

 

  전원이 꺼지고 사각의 바다 속으로 잠겨가는 파도소리.

 

 


 

 

김향미 시인 / 손을 씻는 동안

 

 

사과꽃가지를 꺾어 화관을 만들어야 하나

 

바닥과 등이 서로를 뒤적인다

잡으려는 듯

벗어나려는 듯

 

이파리가 떨리고 사과가 떨리고 손이 떨리는 동안을 골몰하는 바닥들

 

손을 펼치면 말라버린 지류가 있다

부딪쳐 휘돌던 소금기가 말라있다

 

발원지가 눈이었을까 가슴이었을까

골이 패이고

묵묵하게 드러나는 깊이

손은 왜 바닥과 등으로 나뉘었을까

회오리를 감싸는 바닥

안쪽으로 접혀지는 구조는

맞서라는 뜻이었을까

 

안으로 눌러 앉히는 것들로 등이 자주 구부러진다

 

허락된 공중의 지분이 아귀에 모일 때

깊이와 흔적으로 굳어가는 지류

 

콸콸 쏟아지는 물이란 때로 쩔쩔매는 수압이다

 

하루에 몇 번씩 손을 씻는 일

난감이란

바닥에서 등까지 한 가지 일로 뒤척이는 일이다

 

등과 바닥이 어루만지는 동안

푸른 사과가 짙어지는 동안

 

 


 

 

김향미 시인 / 비의 징후

 

 

침상의 머리는 언제나 문이 잘 보이도록 놓여 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걸 알아차린 걸까

샛강 돌들이 움찔한다

 

호스로 이어진 코로 받는 식음을 거부하고

긴 여정에 드는 걸음

 

제 무덤을 찾아가는 코끼리

그 깊은 눈동자를 본 적이 있는가

 

맥박과 혈압을 그리느라 가쁘게 오르내리는 그래프

몬순의 전위적 행위예술처럼 읽다가

 

잠든 모습으로 맞이하는 얼굴을 쓸어내린다

 

몰려온 마지막 색깔을 저장하고

낮아진 하늘

널어놓은 고추의 꼭지들이 들뜬다

 

어스름 거미집의 중심이 되는 나비

멀리 있는 것이 가까이 보이는 것이다

 

들판 곳곳이 굳어가는 물관을 연다

 

 


 

 

김향미 시인 / 물고기자리 여자

 

 

피아노 위 유리 상자 속에 커다란 목선 彫刻이 놓여있다

 

목이 잠긴 피아노 속으로 출렁이는 검은 바다, 갈매기 소리

흰 건반이 눈물을 삼키고

검은 건반이 말을 삼키고

긴 복도에 자리 잡은 검은 피아노가 꽉 다문 입을 열지 않는다

 

목선상자 위에 아로마 향초가 탄다

훌쩍 커버린 음표들이 먼 곳에서 안부를 삼키는 밤

뚜껑 위에 걸쳐진 검은 외투가

항해의 기억이 없는 목선의 뱃머리를 두드리기도 한다

 

침묵을 재단하는 현으로 떨리는 가슴의 언어를 엿듣던 때가 있었다

 

소리가 되지 못한 떨림에 먼지가 쌓이고

검고 흰 밤들이 막대기로 나란한 규칙처럼 반복될 때

내일로 향하는 꿈속에 뱃고동 소리가 울리곤 한다

향초가 흔들리는 곳으로 파도가 밀려온다

긴 복도가 어둠에 잠기고

 

귀가 어두운 남자가 낡은 앨범을 목선 옆에 내려놓는다

아무 멜로디도 새어나오지 않는 밤, 모든 소리가 갇힌 창

피아노가 발견되었다 늘 한 자리를 지키던,

오래된 침묵의 멜로디와 여자의 구름이 발견되었다

 

 


 

 

김향미 시인 / 실어증

 

 

겨울 도로변에 뼈대만 남은 채 섰네 누가 다 먹었지? 어제의

 

성장하는 내면의 아이는

할로윈의 밤에 방문한 푸른 코끼리

펄럭이는 이명을 접고

초원을 돌고 돌아 마지막

가상을 복구하지

 

늘어가는 코스들

닳은 발바닥

서식지를 잃어버리고

 

포란되는 접속사

조각퍼즐이 흩날려

입술에 닿기를 원하지

 

배양된 기호들

언어의 주름 사이

깊은 눈빛을 덧입는

코끼리가 돌아왔어

상징象徵의 자국들

 

코끝에 에피소드를 읽는

상아색 아침이야

 

비바람 계절 없이 기호들이 쏟아지지 가로수는 구름을 향한 붓,

 

 


 

 

김향미 시인 / 움찔, 토르소

 

 

제물을 바쳐라 나는 푸른 눈물을 먹고 사는 식물성 동물이다

 

잘려나간 팔다리보다 더 아픈 가슴이

습한 언어를 요구한다

 

생각날 때마다 가려운 곳과 건드린 후부터 가려운 자리

누군가 지나갔다

 

흐르는 빗물을 퍼올렸던가

물길을 튼다 바람을 안고 달리는 버스 차창으로

 

늦은 봄, 새가 날아간 자리에 열꽃처럼 매달리 보리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가지가 휜다

 

다져지지 않은 흙 위에 부은 시멘트처럼

단단하다고 단정하는 건

실수 같은 다짐이었다

 

강물이 우는 밤마다 분출을 시작하는 핏줄이

식욕처럼 붉어지는

나를 관음한다. 미련 앞에 군침을 흘린다

 

멈출 수 없이 기다린다 고작 가슴에 남아서

해저터널처럼 크고 어두운 입을 감추고

수면 아래 고요히 꿈틀댄다 나는

 

아마 동물성 식물이다

 

-시와반시 2023년 겨울호

 

 


 

김향미 시인

1966년 경북 안동 출생.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과 졸업. 2009년 《유심》 신인상을 통해 등단. 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