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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진 시인 / 나를 도둑맞다
나는 어릴 적 나를 도둑맞았다 섣달에 태어난 것만도 서러운데, 일곱 살배기 꼬마가 외갓집 2층 다락방 곶감 훔쳐 먹고 내려오다 계단 굴러떨어져 하반신 깁스하고 근 2년 방구들 신세 지는 바람에 나도 아닌 나를 둘이나 더 먹고 아홉에야 겨우 학교 문 들어섰으니 말이다
그러고 반평생 훌쩍 지나 '58년 개띠'라는 시 한 편을 어느 지역 문학지에다 실었더니 생전 연락 한번 없던 고향 친구 녀석이 단톡에다 ㅎㅎ 김 시인, 갑이네… 이제 갑질할 나도 됐지 그러면서 시비를 걸어오지 뭔가 나보다 두 살이나 어렸던 그 친구 난데없이 일가 항렬 따지더니 지가 할배뻘이라며 요것조것 잔심부름 다 시키고 나를 개 부려먹듯 끌고 다니던 그 친구 이름자만 떠올려도 나는 금세 을이 되어버린다
그래서일까, 나는 갑이 되도록 나라는 나를 열쇠로 꼭꼭 잠그기만 했지 나와 나 사이 벌어지는 틈새로 나의 비밀번호가 술술 새나간다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산 을, 얼간이었다 나를 열 수 있는 열쇠는 나밖에 없다고 나 뒤에 숨어 여태껏 나라고 우겨댔었는데 며칠 전 지하철 화장실 거울 앞에서 아랫도리 지퍼가 다 열려 있는 나를 훔쳐본 순간 나는 또 나에게 나를 도둑맞았다
김욱진 시인 / 돌리네
상주 함창 공갈못 따돌리고 시인 여섯, 나의 고향 문경문학관 가는 길 굽이굽이 돌고 돌다 황새골 돌리네 습지로 발길 대뜸 돌리네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처럼 억새로 둘러싸인 돌리네 웅덩이 속 들여다보았네 봄나들이 나온 올챙이 오글오글 청첩장을 돌리네 꼬리진달래 활짝 피는 6월이면 두꺼비로 엉금엉금 기어 다닌다는 풍문도 살랑살랑 발가락 휘젓고 돌아다니는 소금쟁이들은 먼 길 돌고 돌아온 산 그리메 빙글빙글 돌리네 물속에 있는 둥 없는 둥 숨어서 요 벌레 조 벌레 잡아먹다 들통난 들통발 난, 수초란 말이야 민망한 듯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네 그 사이 황조롱이 한 마리 날아 앉아 돌리네 해설하는 영감님 말씀 고대로 씨불이기라도 하듯 키득키득 웃음 한바탕씩 죽 돌리네 따돌릴세라, 바람피우고 돌아온 원앙 수달 담비 삵 능구렁이 사진 앞에서 사랑가 한 곡절 부르며 구렁이 담 넘어가듯 눈길을 돌리네 이게 다 습이었네 돌고 돌아 닿은 돌리네 습 잠시 숨 돌리고 한 생각 돌려보니 습이란 습은 다 느릿느릿 왔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연습장이었네 이참에 바쁘게 길들여진 나의 습 한 무더기 여기다 버려두고 가야겠네
김욱진 시인 / 막장에서 만난 형
두 하늘을 모시고 사는 형이 있었다 파란 새벽하늘 쳐다보고 갱 속으로 들어가 숯검댕이 하늘나라 투명인간 되어버린 형, 만나러 갔다 늦가을 해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갑반 일을 마치고 걸어 나오는 검댕이들은 다 나의 형 같아 보였다, 보릿고개 시절 온몸에 깜부기 칠하고 나를 폭삭 속여먹었던 형 엄마한테 검정 고무신 사달라고 떼쓰던 그 형아 오늘은 아무런 말이 없다 동생 공부시키겠다고 처자식 먹여 살리겠다고 막장까지 떠밀려온 형들의 눈빛이 모도 지금, 여기, 나는 없었다 막장 한 모퉁이 꼬부리고 앉아 시시만큼 싸 온 점심 도시락을 까먹으면서도 은성 주포집 빈대떡 두루치기 한 접시 시켜놓고 술잔을 부딪치며 먼저 떠난 이의 이름 되뇌면서도 갱 입구 쓸쓸히 서 있는 동상을 바라보면서도 시커먼 석탄 가루 뒤집어쓴 형의 마음은 늘 새카맣게 타들었을 터 어렵사리 대학 간 동생 고시 패스만 하면 팔자가 늘어질 끼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형 석 달에 한 번쯤 광산 이발관 들러 밑도리도 하고 사택 공동 목욕탕에서만 항상 목간하던 형 간주 받는 날이면 어김없이 은성 식육점 돼지고기 두어 근 새마을 구판장 소고기라면 대여섯 봉다리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던 형 목소리가 고대로 살아남아 있는 문경 석탄박물관 단칸방 사택에는 아직도 라면땅 사 오는 형을 기다리며 나의 조카 질녀들은 딱지치기하고 있다 연탄불 피워놓은 따듯한 방에서 내가 편히 잠들었던 그 시간 형은 월남막장에서 석탄을 캐고 있었다
김욱진 시인 / 삼강주막
바짓가랑이 쩍 벌리고 문지방 걸터앉아 담뱃재 떨어지는 줄도 모른 채 옹벽에 나붙은 메뉴판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살아생전, 외상값은 그을음 꽉 낀 부엌 벽에다 그저 막걸리 한 사발은 짧은 세로 금 한 됫박은 긴 세로 금 외상을 갚으면 가로로 죽 그어버렸다는 사진 속 주모 할머니
막걸리 한 됫박 다섯 냥 메밀묵 한 대접 넉 냥 지짐이 한 두레 석 냥 두부 한 모 두 냥 이럭저럭 해서 한 상에 열두어 냥은 받았을 법한 그 시절
나룻배 타고 분주히 드나든 보부상들 외상값만 제대로 받아 가셨더라도 노잣돈쯤이야 두둑하셨을 터인데
김욱진 시인 / 사소한, 사소하지 않은
어릴 때 꼬드밥 우물우물 씹어 내 입에 넣어주신 할머니 이가 다 빠졌다 거짓말 많이 해서 그렇다고 하셨다 네 살 아래 여동생 감쪽같이 속여 요리조리 부려먹고 우려먹은 게 수도 없이 많았는데 덜컥 겁이 났다 그 후로 나는 여동생과 얘기할 땐 '참말로' 라는 말을 거짓말처럼 써먹었고 그러면 여동생은 철석같이 믿었다 열 살 되던 해, 어금니가 흔들거렸다 엄마한테 들키면 혼날 것 같아 몇 날 며칠 숨기다 할머니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빌었다 할머니 합죽이 웃으며 거짓말처럼 옭아맨 내 어금니 콱 잡아당기며 정수리 팍 내리쳤다 쑥 둘러빠진 이빨 아궁이 속으로 집어던지며 나 보고 '헌 이 줄게 새 이 다오' 그러란다 이 다 빠진 할머니 거짓말 참말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김욱진 시인 / 접붙이다
좌익우익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고욤나무에다 감나무 접붙였다 감나무 눈을 떼다 억지로 고욤나무 눈에다 흙을 바르고 붙였으니 둘 다 눈앞이 캄캄하고 어리둥절했겠다 눈과 눈 경계 허물어진 봄이 되자 고욤나무에서 감나무 이파리 돋았다는 소문이 온 동네 파릇파릇 퍼졌다 눈 떼 붙이고 재미를 본 할아버지 비알 밭에다 면소 다니는 아버지 눈마저 접붙였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좌익으로 몰려 하루가 멀다 않고 감시의 눈초리 피해 다녀야만 했던 아버지 부득이 왼 눈을 떼다 오른 눈에 다급히 접붙였다 서로 다른 두 눈 만나 한 뿌리 내리고 사는 길 틔우며 밭떼기 머슴 노릇하던 아버지 그 이듬해 된서리 맞고 말문 닫더니 눈 감으셨다 고욤나무에 아버지 주먹 같은 먹감 주렁주렁 달렸다 일찌감치 좌우익 바람 스쳐지나간 고향 마을 환갑을 눈앞에 둔 나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마흔일곱 먹은 아버지 먹감나무 앞에서 어린 고욤나무 눈물 닦아주고 서계신 아버지, 먹먹하다
김욱진 시인 / 박달나무 눈 참, 밝다
문경새재 박달나무 한 그루 내 방 귀퉁이 옷걸이로 거듭났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만 듣고 살다 이젠 내 잔소리까지 듣고 산다 나무가 옷 갈아입었다 옷이 나와 옷걸이 번갈아 입었다 낮에는 나를 입고 밤에는 옷걸이를 입었다 내가 옷걸이 옷을 입고 옷걸이가 내 옷을 입어도 옷은 걸림이 없다 팔다리 잘린 옷걸이 옷 걸쳐 입을 때마다 나의 팔다리는 떨어져 나갔고 해지고 터진 바짓가랑이 사이로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들렸다 나무가 옷을 입었다 옷이 나를 걸쳐 입었다 나는 옷걸이에 걸렸다 품도 소매도 없는 옷걸이에 어깨만 걸친 옷 한 벌 걸렸다 눈 밝은 *달달박박 옷 갈아입은 듯 박달이 입은 옷, 걸림이 없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경을 듣는(聞經) 새재의, 이 아침
*달달박박 : 통일신라시대 노힐부덕과 쌍벽을 이룬 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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