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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욱진 시인 / 나를 도둑맞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4.
김욱진 시인 / 나를 도둑맞다

김욱진 시인 / 나를 도둑맞다

 

 

나는 어릴 적 나를 도둑맞았다

섣달에 태어난 것만도 서러운데, 일곱 살배기 꼬마가

외갓집 2층 다락방 곶감 훔쳐 먹고 내려오다 계단 굴러떨어져

하반신 깁스하고 근 2년 방구들 신세 지는 바람에

나도 아닌 나를 둘이나 더 먹고

아홉에야 겨우 학교 문 들어섰으니 말이다

 

그러고 반평생 훌쩍 지나

'58년 개띠'라는 시 한 편을 어느 지역 문학지에다 실었더니

생전 연락 한번 없던 고향 친구 녀석이 단톡에다

ㅎㅎ 김 시인, 갑이네… 이제 갑질할 나도 됐지

그러면서 시비를 걸어오지 뭔가

나보다 두 살이나 어렸던 그 친구

난데없이 일가 항렬 따지더니 지가 할배뻘이라며

요것조것 잔심부름 다 시키고

나를 개 부려먹듯 끌고 다니던 그 친구

이름자만 떠올려도 나는 금세 을이 되어버린다

 

그래서일까, 나는

갑이 되도록

나라는 나를 열쇠로 꼭꼭 잠그기만 했지

나와 나 사이 벌어지는 틈새로

나의 비밀번호가 술술 새나간다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산 을, 얼간이었다

나를 열 수 있는 열쇠는 나밖에 없다고

나 뒤에 숨어 여태껏 나라고 우겨댔었는데

며칠 전 지하철 화장실 거울 앞에서

아랫도리 지퍼가 다 열려 있는 나를 훔쳐본 순간

나는 또 나에게 나를 도둑맞았다

 

 


 

 

김욱진 시인 / 돌리네

 

 

상주 함창 공갈못 따돌리고

시인 여섯, 나의 고향 문경문학관 가는 길

굽이굽이 돌고 돌다

황새골 돌리네 습지로 발길 대뜸 돌리네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처럼

억새로 둘러싸인 돌리네

웅덩이 속 들여다보았네

봄나들이 나온 올챙이 오글오글 청첩장을 돌리네

꼬리진달래 활짝 피는 6월이면

두꺼비로 엉금엉금 기어 다닌다는 풍문도 살랑살랑

발가락 휘젓고 돌아다니는 소금쟁이들은

먼 길 돌고 돌아온 산 그리메 빙글빙글 돌리네

물속에 있는 둥 없는 둥 숨어서

요 벌레 조 벌레 잡아먹다 들통난 들통발

난, 수초란 말이야

민망한 듯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네

그 사이 황조롱이 한 마리 날아 앉아

돌리네 해설하는 영감님 말씀

고대로 씨불이기라도 하듯

키득키득 웃음 한바탕씩 죽 돌리네

따돌릴세라, 바람피우고 돌아온 원앙

수달 담비 삵 능구렁이 사진 앞에서

사랑가 한 곡절 부르며

구렁이 담 넘어가듯 눈길을 돌리네

이게 다 습이었네

돌고 돌아 닿은 돌리네 습

잠시 숨 돌리고 한 생각 돌려보니

습이란 습은 다 느릿느릿 왔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연습장이었네

이참에 바쁘게 길들여진 나의 습 한 무더기

여기다 버려두고 가야겠네

 

 


 

 

김욱진 시인 / 막장에서 만난 형

 

 

두 하늘을 모시고 사는 형이 있었다

파란 새벽하늘 쳐다보고 갱 속으로 들어가

숯검댕이 하늘나라 투명인간 되어버린 형, 만나러 갔다

늦가을 해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갑반 일을 마치고 걸어 나오는 검댕이들은 다

나의 형 같아 보였다, 보릿고개 시절

온몸에 깜부기 칠하고 나를 폭삭 속여먹었던 형

엄마한테 검정 고무신 사달라고 떼쓰던 그 형아

오늘은 아무런 말이 없다

동생 공부시키겠다고 처자식 먹여 살리겠다고

막장까지 떠밀려온 형들의 눈빛이 모도

지금, 여기, 나는 없었다

막장 한 모퉁이 꼬부리고 앉아

시시만큼 싸 온 점심 도시락을 까먹으면서도

은성 주포집 빈대떡 두루치기 한 접시 시켜놓고

술잔을 부딪치며 먼저 떠난 이의 이름 되뇌면서도

갱 입구 쓸쓸히 서 있는 동상을 바라보면서도

시커먼 석탄 가루 뒤집어쓴 형의 마음은 늘 새카맣게 타들었을 터

어렵사리 대학 간 동생 고시 패스만 하면

팔자가 늘어질 끼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형

석 달에 한 번쯤 광산 이발관 들러 밑도리도 하고

사택 공동 목욕탕에서만 항상 목간하던 형

간주 받는 날이면 어김없이 은성 식육점 돼지고기 두어 근

새마을 구판장 소고기라면 대여섯 봉다리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던 형

목소리가 고대로 살아남아 있는 문경 석탄박물관

단칸방 사택에는 아직도 라면땅 사 오는 형을 기다리며

나의 조카 질녀들은 딱지치기하고 있다

연탄불 피워놓은 따듯한 방에서 내가 편히 잠들었던 그 시간

형은 월남막장에서 석탄을 캐고 있었다

 

 


 

 

김욱진 시인 / 삼강주막

 

 

바짓가랑이 쩍 벌리고 문지방 걸터앉아

담뱃재 떨어지는 줄도 모른 채

옹벽에 나붙은 메뉴판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살아생전, 외상값은

그을음 꽉 낀 부엌 벽에다 그저

막걸리 한 사발은 짧은 세로 금

한 됫박은 긴 세로 금

외상을 갚으면 가로로 죽 그어버렸다는

사진 속 주모 할머니

 

막걸리 한 됫박 다섯 냥

메밀묵 한 대접 넉 냥

지짐이 한 두레 석 냥

두부 한 모 두 냥

이럭저럭 해서

한 상에 열두어 냥은 받았을 법한 그 시절

 

나룻배 타고 분주히 드나든 보부상들

외상값만 제대로 받아 가셨더라도

노잣돈쯤이야 두둑하셨을 터인데

 

 


 

 

김욱진 시인 / 사소한, 사소하지 않은

 

 

어릴 때 꼬드밥 우물우물 씹어

내 입에 넣어주신 할머니 이가 다 빠졌다

거짓말 많이 해서 그렇다고 하셨다

네 살 아래 여동생 감쪽같이 속여

요리조리 부려먹고 우려먹은 게 수도 없이 많았는데

덜컥 겁이 났다

그 후로 나는 여동생과 얘기할 땐

'참말로' 라는 말을 거짓말처럼 써먹었고

그러면 여동생은 철석같이 믿었다

열 살 되던 해, 어금니가 흔들거렸다

엄마한테 들키면 혼날 것 같아

몇 날 며칠 숨기다

할머니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빌었다

할머니 합죽이 웃으며

거짓말처럼 옭아맨 내 어금니

콱 잡아당기며 정수리 팍 내리쳤다

쑥 둘러빠진 이빨

아궁이 속으로 집어던지며

나 보고 '헌 이 줄게 새 이 다오' 그러란다

이 다 빠진 할머니 거짓말

참말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김욱진 시인 / 접붙이다

 

 

좌익우익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고욤나무에다 감나무 접붙였다

감나무 눈을 떼다

억지로 고욤나무 눈에다 흙을 바르고 붙였으니

둘 다 눈앞이 캄캄하고 어리둥절했겠다

눈과 눈 경계 허물어진 봄이 되자

고욤나무에서 감나무 이파리 돋았다는

소문이 온 동네 파릇파릇 퍼졌다

눈 떼 붙이고 재미를 본 할아버지

비알 밭에다 면소 다니는 아버지 눈마저 접붙였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좌익으로 몰려

하루가 멀다 않고 감시의 눈초리 피해 다녀야만 했던 아버지

부득이 왼 눈을 떼다 오른 눈에 다급히 접붙였다

서로 다른 두 눈 만나 한 뿌리 내리고 사는 길 틔우며

밭떼기 머슴 노릇하던 아버지

그 이듬해 된서리 맞고 말문 닫더니 눈 감으셨다

고욤나무에 아버지 주먹 같은 먹감 주렁주렁 달렸다

일찌감치 좌우익 바람 스쳐지나간 고향 마을

환갑을 눈앞에 둔 나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마흔일곱 먹은 아버지 먹감나무 앞에서

어린 고욤나무 눈물 닦아주고 서계신 아버지, 먹먹하다

 

 


 

 

김욱진 시인 / 박달나무 눈 참, 밝다

 

 

문경새재 박달나무 한 그루

내 방 귀퉁이 옷걸이로 거듭났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만 듣고 살다

이젠 내 잔소리까지 듣고 산다

나무가 옷 갈아입었다

옷이 나와 옷걸이 번갈아 입었다

낮에는 나를 입고

밤에는 옷걸이를 입었다

내가 옷걸이 옷을 입고

옷걸이가 내 옷을 입어도

옷은 걸림이 없다

팔다리 잘린 옷걸이

옷 걸쳐 입을 때마다

나의 팔다리는 떨어져 나갔고

해지고 터진 바짓가랑이 사이로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들렸다

나무가 옷을 입었다

옷이 나를 걸쳐 입었다

나는 옷걸이에 걸렸다

품도 소매도 없는 옷걸이에

어깨만 걸친 옷 한 벌 걸렸다

눈 밝은 *달달박박 옷 갈아입은 듯

박달이 입은 옷, 걸림이 없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경을 듣는(聞經) 새재의, 이 아침

 

*달달박박 : 통일신라시대 노힐부덕과 쌍벽을 이룬 고승

 

 


 

김욱진 시인

1958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경북대 사회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2003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슬산 사계』 『행복 채널』 『참, 조용한 혁명』 『수상한 시국』과  2020년 전 세계 시인들의 코로나19 공동 시집 『地球にステイ(지구에 머물다)』가 있음. 2018년 제 49회 한민족통일문예제전 우수상 수상. 2020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 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