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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욱 시인 / 다른 건 잘 몰라도
멸치젓을 담급니다 소금을 한 줌씩 뿌리며 항아리 속으로 당신도 반 정도 담가봅니다 개중 한 마리 건져 맛을 보며 다른 건 잘 몰라도 젓갈은 천일염으로 꾹꾹 눌러야 한다고 중얼거립니다 다른 건 몰라도 소금은 넉넉히 버무려야 한다고, 밀봉도 야무지게 해야 한다고,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가야 한다고 합니다 다른 건 모른다는 건 비로소 채비가 되었다는 것 그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깊은 말 영님*해야 한다는 것과 누군가에게 화석이 되어야 한다 는 것입니다 얼마나 만졌는지 지문에 피어난 소금꽃 그러고도 사람은 적당히 싱거워야 한다는 당신 그 앞에선 알았다는 말조차 쉬 할 수 없습니다 간이 배도록 여태 만져준 손 발효된다는 것은 안으로 간이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다른 건 잘 몰라도
*영님: 똑똑히, 야무지게의 전라도 사투리.
이진욱 시인 / 무정
남보다 먼 아버지였다. 단 한 번도 집 떠난 적 없지만 늘 밖이었던 아버지였다. 가진 것은 뒷짐뿐인 검불도 쥐지 못할 만큼 가벼운 아버지였다. 전부(全部)였으나 일부(一部)도 아니었던 세월만 필사하던 아버지였다. 그림자마저 점점 짧아져 희미해지던 아버지였다.
난생 처음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여유가 되면 오십만 원만 빌려달라고, 엄마에게 보청기를 해줬으면 한다고, 너도 자식 키우느라 힘들 텐데 미안하다고, 가을쯤 갚는다고 했다. 오래전부터 깊고 깊은 달팽이관 속에서 헤매던 엄마였다. 뭔 말씀이냐고, 당장 보내드린다고, 더 필요하지 않으시냐고, 부자간에 뭘 갚느냐고, 부담 갖지 마시라고 했다. 수화기를 열 번은 더 들었다 놓았을 아버지의 무정한 손이 어깨 위에 얹히는 듯했다. 달팽이관 속에서 달팽이가 울었다.
-<시인동네> 2015년 겨울호
이진욱 시인 / 쌍화차에 보름달이 두 개나 뜨던 날
벌교와 고흥을 잇던 27번 옛 지방도가 4차선으로 확장된 뒤 다시는 흙먼지가 일지 않았다. 울창했던 메타세쿼이아도 시름시름 사람들을 앓기 시작했다. 경운기는 점점 천덕꾸러기가 되어갔다. 소문보다 먼저 도착한 복덕방에는 외간여자들이 빼곡하게 들러 앉아 화투짝을 만졌다. 청년들은 밤늦도록 색싯집을 기웃거렸지만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쌍화차에 보름달이 두 개나 뜨던 날 당신 생에는 없던 거드름과 악수한 종백부 손이 종일 다방레지 치마 속을 들락거렸고 군수보다 바쁜 이장 얼굴엔 개기름이 번들거렸다. 개발(開發)은 개발도 땀나게 할 만큼 누구나에게 기회가 되었지만 정작 섭섭하게 땅문서를 넘긴 아버지는 끝내 머리를 싸매고 누웠고 팔자에도 없는 자책을 밤새 늘어놓았다. 팔 땅도 떠날 수도 없는 사람들만 오래도록 입을 닫고 살았다. 침묵은 영원히 돈이 되지 않았다.
이진욱 시인 / 안부
간만에 고향집에 전화를 했다 집집마다 카네이션이 붉게 타오르던 날이었다
잉, 둘째냐, 휴일엔 쉬제 멀라고 전화를 했냐? 거시기 전번 참엔 뭔 돈을 그렇게 많이 보내부렀냐, 요긴하게 쓰긴 썼다만서도 느그도 팍팍허끈디, 참말로 염치도 없는 부모다, 미안허다, 부모가 돼가지고 맨날 손이나 벌려쌓고............. 앞으로 니 얼굴을 어치께 볼까 모르것다 거시기 느그 아부지는 요 매칠 새 무릎에 또 지랄병이 도졌는갑다 느그가 편하게 살라믄 우덜이 안 아파야 쓰근디 뭔 넘의 목숨이 이라고 질긴지 몰것다 어디 아픈 데는 없쟈, 몸 아프믄 출세도 시(詩) 나부랭이도 다 부질 없응께 간수 잘 혀고, 에미 말 허투루 듣지 말고............. 거시기 산발한 비가 쪼께 온다만 보로시 바닥만 적실 정도다 게으른 넘 비 핑계 대고 자빠져 잠자기 딱 좋게 내린다 아이구, 전화세 많이 나온디 끊자, 할 말 없쟈?
“식사는 하셨어요?" 전화는 내가 넣었는데 삼십분 동안 나는 이 말 한 마디밖에 못했다
이진욱 시인 / 희곡(喜曲)을 기다리다
1 어둠이 납작하게 내린 날 모서리에서 동선이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했어 늙은 배우는 처음부터 피곤함에 절어 있었어 행동이 느려지는 순간 효과음은 아래쪽에 모로 세웠어 쉰 목에서 나오는 대사는 푹 삶아 졌어 꿈틀대는 거친 숨결도 그렸어
2 중간 즈음 언덕도 하나 만들었어 그곳에 사는 소년의 눈동자를 세밀하게 써 내려갔어 조명은 절정이 막 지날 때 F. I* 됐어 아- 조금 늦었어 아무 대사도 못 쓰겠는데 원고지 속 배우들은 나만 보고 있어 Staff도 관객도 극장 경비도
3 오늘 밤에는 못 오지만 내일은 꼭 오겠다고 전해 달랍니다**라는 말을 소년은 늙은 배우를 향해 중얼거리고 있었어
4 사실, 내가 틀렸든 부족했든 모두 비웃었어 막이 내린 뒤 늙은 배우가 원고지에서 튀어나왔어 소년은 상기된 얼굴로 눈치만 봤어 끌고 가지 못할 희곡을 쓴 내 탓이라고 원고지 속에서 웅성거렸어 자판도 창문도 천정도 눈이 빠질 듯 아팠고 귓속은 윙윙거렸어 조용히 해 제발!
5 파쇄기로 밀려들어 간 늙은 배우는 잘려나갔어 준비 없는 무대에 그림을 그린다고 나만 호들갑을 떨었어 소년의 중얼거린 말은 나에게 했던 것이었어
6 난 지금도 비상구를 찾아 꺼진 모니터 안에서 우두커니 기다렸어 먼지 쌓인 무대처럼
*페이드인 F. I(Fade-In): 무대가 차츰 밝아지는 것, 용명(濬明)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중 소년 대사 인용
-2012년 <시산맥> 신인상 당선작
이진욱 시인 / 초파일
쌀을 안칠 때 한 줌씩 덜어내던, 그런 어머니와 닮은 암자庵子로 따라나섰다
기척이 뜸한 귀퉁이에 거뭇하게 녹슨 작두펌프 넝쿨이 끌어온 어린 칡잎이 입을 적시고 경 읊던 박새도 목을 축이고 가는 약수
코 닳고 귀 떨어진 석불 앞에 나서지 못하고 외려 물만 보시받았다
반질반질 맨살을 들어낸 손잡이 펌프질을 할수록 주둥이에서 힘 좋은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맘껏 퍼 올려도 줄지 않을 것처럼
한 때 나는 모질도록 펌프질을 멈추지 않았고 줄게 없던 어머니의 몸속에서 슬픈 소리가 났다
얼마나 파고 들어가면 쏟아낼까 반쯤 잠긴 내가 허우적대던 그 눈물
-<시와반시> 2022년 여름호, 에서
이진욱 시인 / 세탁소 최 사장
옷은 언제부터 날개가 되었을까
곰이 탈피를 하고 토굴 밖으로 나와 새의 깃을 걸친 뒤 날개가 옷이 되었다는 전설을 들은 적 있다
세상에 옷만큼 흔한 게 없다며 툭하면 옷 한 벌 사 입으라는 세탁소 최 사장 배달 길에 다가와 옷 한 벌 사 입으라고 또 놀린다
철 지나고 밑단이 닳은 옷이 먼저 띄었나 보다 찢긴 옷도 유행하는 세상인데 벗고 살까 싶어 그러냐고 되물었지만 깃 빠진 새처럼 어깻죽지가 내려앉았다
폼 나는 옷 한 벌 장만한 뒤 깃털을 여미고 싶은 생각 없을까만 한 시절 지나면 추락할까 싫고 외투만 챙겨야 하는 겨울도 싫다
토굴처럼 깊고 낮은 집으로 돌아와 곰의 몸으로 식구의 체온을 껴입으며 생각한다
깃을 잃어도 새는 검고 반짝이는 눈을 가졌다
-<다층≫ 2020,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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