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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강 시인 / 행복한 오후
부드러운 빛이 다가와 아이와 여자의 시간을 웃음으로 머물게 하는 오후 속삭이는 햇살 떠나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미리 알고 가는 이의 옆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당신을 만나 순수한 마음을 갖었지 당신을 알아 설레는 마음을 얻었지 그 계절을 살았지 소멸과 불멸의 중간에서 숨고르기 아직이라는 말 이전에 애매한 죽음이 있었지 이렇게 햇살방석이 사람을 살리고 있지 아이야 아장아장 걸으렴
고궁에 갔지 세살 문양에 햇빛이 소소하지 그림자 리듬을 알지 진주 실크등이 청사초롱 빛나지
최희강 시인 / 바람 바람 봄
봄조차 숨박꼭질하네
아픔을 감추지 않고 사소한 기억의 맛을 남기네 오직 찻잔소리만 들릴 뿐
풀지 않은 억압은 풀베기하네 품지 못한 희망은 모내기하네 계절의 모순이 한 줄기로
어둠이 쌓이지 않도록 미움이 비움이 동시에
참살이 달을 보면 반의 관계 너머의 울타리를 연주하네 숨소리를 안아주네
무지가 무지개를 포개고
사람조차 숨막히네
어느 바람에 기대치를 두어야 할지 아차하며 자라나는 봄
이별조차 자랑스럽네
천년의 그리움이 적멸에 면회가네
많은 바람 중에 꽃기린 나무 사이로 부는
- 계간 <시사사≫ 2022년 봄호에서
최희강 시인 / 욕실에서의 또 하루가 지나간다
11시 밤과 낮의 물은 평화로워 새벽을 맞이할 때 오늘은 한 명에게 선물하는 날 생일 즐거워 기차 안에서 본 문구 ‘분만 24시’ 벚꽃 길 지나 어린 뻐꾸기 날개 그리워 애도하는 하늘 밝아온다
나의 커다란 모던 보이, 보이는 거울을 좋아해 구름의 헛기침이 잦아드는 밤 매일 욕실에서의 익숙한 물을 생각해 배꼽이 부풀어 오르는 밤 봄 벚꽃이 만개해 연분홍 비누거품 놀이 휘날리더라 피어날레
물결은 잔잔하며 고요하고 식은땀은 체온을 잃어버려 감쪽같이 휘말리더라 공평한 어둠은 불안을 뒤집고 밝은 등불은 마음을 차츰 안정시키더라
무감각해진 불안 무의미한 안경 무기력한 손 새봄 기다리는 깡마른 희망들
불우의 풍경은 없고 불운의 시대는 피투성이다 욕실 바닥으로 흐르는 물과 피 어떤 피는 상처를 내놓고 금방 굳어간다 어차피 똑같은 피
최희강 시인 / 인연 겨울을 이겨내 지금 코를 만지네 밤은 푸르네 그녀는 예뻤다 이팝나무의 사랑꽃이 피우도록 하얀 밤에 혼자서 물을 마시네 남자는 바하리야 오아시스 주변의 백사막에 있네 누군가 피워놓은 화톳불에 어지러운 마음을 내려놓고 사막의 밤에 바다가 솟구쳐 형성된 지형은 새가 되어 떠날 채비를 하네 남자는 강하네 사막 가운데 조용히 자신의 입술을 축이네 어느 시인이 사랑한 이름 어느 시인이 기억한 이름 기다리면 될까요 어떻게 만나는지요 오직 당신만이 나의 입술에 키스를 하네요 하얀 석고 조각으로 누워 있는 강이라는 이름 사랑을 내려놓고 사랑을 마주하네 하얀밥 가득 입에 넣고 사랑은 가만히 있어도 내게로 오는 바람 불어라 낙타가 걷는 동안 당신의 눈동자는 살아있네 그 입술을 사랑하네 겨울을 이겨내 지금 그 얼굴을 만지네 사막의 문구 마지막 문장인 당신
최희강 시인 / 광흥창에서 맴돌다
당신의 시집을 찾으러 갑니다 돼지 껍데기를 먹고 기억을 꿀꺽했어요 꿈 깨요 동강의 물살과 번지점프에 과감해졌어요 빅뱅이랄까 무덤은 예약되었고 이미 도착한 요람이에요 해변의 모래알은 반짝이는데 우리는 광흥창에서 눈빛 잃어가네요 돌멩이에서 바위가 멀어져갔다 모래도 자유 가루도 자유 먼지가 되어 지루해하는 행성까지 가보자 시집 속에 기거하는 작은 먼지가 출발점
당신과 나는 종이꽃으로 피어나지요 광흥창역 우체국이 있나요 뼈와 살이 손을 움직여 편지를 쓰고 우표를 붙이는데 무한궤도 풍선껌을 씹고 지구본을 돌리면서 사람을 만나러 갑니다
최희강 시인 / 축복
파란 하늘을 바라봐 눈으로 공기를 쏴봐 어떤 공기가 좋을까 명중은 아니라도 눈썹은 당신의 이마에 머물러 속삭이네
인연을 축복하네 웃음은 화사하네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가서네 메아리 울리는 그곳으로 같이가네 5월의 신부는 두 팔 벌려 안아주게
처음 콩을 볶는 마음으로 사랑하기로 하네 연꽃 맞이하는 마음으로 청명하기로 하네 맑디맑은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기로 하네
합심하여 사랑의 줄 당기네 부드러운 이마에 키스하네 환호하며 두 손 잡고 걸어가네
얼마나 값진 결혼인가 얼마나 값진 인연인가
최희강 시인 / 우리는 조용히 바라본다
서 있는 무릎마다 차례로 살아가고 두 손을 모으고 나면 생각이 식탁 위로 가로질러 간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때 블라인드 사이로 태양은 찢어진다 눈을 깜박이지 않을 거야
뛰어내리는 무릎을 따라 무릎은 소란스럽게 마주친다 욕망을 다오 눈썹을 다오
발걸음들이 서로를 쫓아낼 때 갈비뼈가 어둠 속에서 울고 있다 검정 없는 밤 어느 곳에 앉아버린 나비뼈
부득이한 의자 부득이한 안경 부득이한 입술
메마른 입이 사라지는 곳으로 커다란 인사를 남겨두고 오늘의 방향은 심심해하는 이마를 추가한다 반짝거리자 어떤 형태로 식어가는 마음을 위하여 시소의 바깥을 움직인다
불안은 너의 수저
한 사나이가 오토바이를 타고 꽃밭을 비껴가고 들판을 달린다 우리는 조용히 바라본다 세상 끝에서도 오토바이는 깨어나지 않는 수면제이다
불안은 너의 어깨
맨 위로 올라가 여기에 저기에 떠도는 떠오르는 것들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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