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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이나 시인 / 동굴 수도원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4.
한이나 시인 / 동굴 수도원

한이나 시인 / 동굴 수도원

 

 

 문장의 길 끝에 동굴수도원이 있다

 

 바위동굴 안에 몸 들어서자 푸른 전율,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네 마음의 안쪽에 닿는다 고개 젖혀 서늘한 고요의 얼굴 바라 본다 길 끝이고 시작인 궁극의 한 점을 붙들고 한참을 그대로 자리에 못 박힌다 한 발자국도 도무지 나갈 수가 없다

 

 나는 간절함의 깊이 속으로 사무침 속으로 검은 문장을

 메꾸며 들어가는 중이다, 수도(修道)

 

 그건 사랑이었다

 

 


 

 

한이나 시인 / 거대한 달력의 저쪽

 

계단으로 된 달력을 본 적이 있다

 

365일을 동서남북 사면 계단으로 쌓아 올린

마야인의 피라미드 체첸잇차

추분이나 하지에 멕시코 가면

햇빛에 따라 세 시간 더딘 걸음으로 내려오는

날개 달린 뱀 쿠클칸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신전 앞에서 박수를 치면

신성한 새 케찰의 우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인신공양 제물 된 젊은 피, 영혼의 속울음일까

 

널찍한 돌 위엔 옆 경기장 건장한 우승 남자의

뛰는 심장이 바쳐지고

초경도 하지 않은 앳된 소녀의 목을 바친

피 한 사발

 

흘러내린 피가 뱀이 되어

용솟음치는 조각으로 제단 신전에 새겨져 있지

 

내가 오르다가 멈추어 선 계단 한가운데서

시작도 멸망도 수수께끼인

하루아침에 자취 감춘 마야의 천 년 달력

숫자를 세어 보다가 시간을 잃어버리다

 

0의 발견이다 나는 빈 자리, 새로 탄생할 별 하나다

 

 


 

 

한이나 시인 / 노독(路毒)

 

 

물에 파묻힌 길 찾아 구례 산꼭대기 사성암,

절로 간 소들

 

새벽마다 울려 퍼지던 절벽 위의 사원

사시 예불 목탁소리의 진동과 진폭을

뜬잠에 자주 들었음이야

마을 외양간에서 통증을 잊고 위로를 받았음이야

장마에 둑 무너져 물바다 된, 혼몽 속

축사 탈출해 장대비 맞으며 오산 자락에 오른

한무리 소들,

 

아랫마을에서 한 시간 뚜벅뚜벅 걸어 왔을까

간적면에서 문적면까지 이십 리 떠내려가며 헤엄쳐 왔을까

목마름에 찾던 49 선지식 비로소 약효를 알았는지

누구 하나 절마당에서 뛰놀거나 울음소리 내지 않고

얌전히 쉬다가 떠났다,

 

세상의 한끝에서 마음의 등불을 찾아

어두워져서야 빈손으로 내려왔던

사성암 산속의 먼 길,

굽이도는 구름 길,

 

소들도 그 어둠을 믿음으로 건넜으리

 

 


 

 

한이나 시인 / 나 절필해도 좋으리

 

 

저, 푸른꽃

 

초록에 어둑살 깔리는 서하리

산꼭대기 흰 바람개비 옆

 

푸른 빛의 키 작은 꽃

육십만 평 너른 산비탈을 가득 채운 푸른꽃

 

가까이 다가가면 모습이 변해

더는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너는,

가까이서는 볼 수 없는

다가가면 멀어지고 마는 시간의 꽃

먼 생 숨은 사랑,

 

모든 것을 잊고 이랑마다 흙 속에 심어져

저 전심전력,

고랭지 비탈에 피어난 시간이 멈춘 사랑

 

숨 쉬는 잎과 잎 사이, 겹겹의 속살들

배추 흰 나비 애벌레의 말이 있다

바람개비가 돌리는 밭둑 돌멩이의 온기

꿈속에서 완성된 너,

 

푸른꽃*을 만난다

 

*푸른꽃- 독일 시인 노발리스의 미완의 소설로 낭만적 이상의 상징

 

 


 

 

한이나 시인 / 목련꽃차

 

 

찻잔에 꽃이 피었다

밀려둔 목련꽃차를 마셨다

목련의 흰 빛

너무도 단순하여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열정

꽃과 나날들의

기억을 오래 붙잡아두기 위하여

꽃봉오리를 덖고 덖었던 시간들

나를 관통하여 지나갔을

찻잔 속에 가라앉은

꽃숭어리를 본다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다 써버려야 끝이 났을

봄 끝에 떨어진 꽃의 살점들

현재란 어디에 있는 걸까

찻잔 속 꽃으로 그가 내게 왔다

 

 


 

 

한이나 시인 / 대나무 속 대금소리

 

 

담양 죽녹원 대나무 한 그루

마음에 풀어놓고

오래 깊이 대나무통 어둠까지 들여다본다

 

댓바람에 말갛게 씻은 소리의 푸른 뼈

일필휘지ㅡ筆揮之

대나무통 속 갇혀있던 숨결 불러내어

듣는, 푸른 대금소리

화선지에 저리고 시린 숨결이 곱게 스민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끌어올리는 소리 듣는다

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로 돌아가면서

혼자 묻고 답하며 혼자 어루만지며 쓰다듬는

내 마음속의 대나무,

그 푸른 대금소리.

 

 


 

 

한이나 시인 / 화염산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풀 한 포기 없다

 

일제히 수천수만의 불꽃이 하늘로

솟아 올라가는 화염산

산 전체가 불에 싸여 이글거리는

제 몸을 제물로 올리는 소신공양이다

 

계곡 맞은편 천불동 석굴 벽화에서 빠져나와

뜨거움의 불길 속 꿈쩍 않고 석가모니불

산맥처럼 길게 누워 계신다

천 귀로 듣고 천안으로 보며 미소 짓는.

 

울지 마라

누가 있어 파초선을 가져와 마흔 아홉 번의

부채질로 화염산의 불을 끄겠는가

바람도 넘어가지 못하고 내려오는 사암 그 붉은 빛

화염의 구경 무아경지!

 

나는 불타는 산에

불타는 내 사랑을 던져 넣었다

 

 


 

 

한이나 시인 / 서서 하는 독서

 

 

​멀어지는 물의 도시에 걸린 석양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걸려

해거름이 한 점 붉다

함께 베네치아에 가자

꿈속의 꿈 헛디딘 말을 위하여

단 하나의 음, 단 하나의 획, 단 하나의 문장을 위하여

이 세상 모든 여행은 내가 나를 그리워한 사랑이다

감정 박물관에 유물로 남은 한 잎의 말이

서천을 붉게 물들인다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다

물길을 타고 낙엽 배

그 물결에

흑해 지브롤타 해협까지 떠내려갈 것이다

포말의 물거품에 한 생애가 섞이며 벗어나며 검은 바다까지

 

 


 

한이나 시인

1951년 충북 청주 출생. 청주교육대학 졸업. 1994년 《현대시학》 을 통해 등단. 시집 『가끔은 조율이 필요하다』 『귀여리 시집』 『능엄경 밖으로 사흘 가출』 『유리 자화상』 『 플로리안 카페에서 쓴 편지』 『물빛 식탁』 등. 2010년 서울문예상 대상, 2012년 한국시문학상, 2018 꽃문학상, 2020 대한민국시인상 대상, 2020 영축문학상,  2016 세종도서나눔 선정 수상. 현재 한국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가톨릭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