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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이나 시인 / 동굴 수도원
문장의 길 끝에 동굴수도원이 있다
바위동굴 안에 몸 들어서자 푸른 전율,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네 마음의 안쪽에 닿는다 고개 젖혀 서늘한 고요의 얼굴 바라 본다 길 끝이고 시작인 궁극의 한 점을 붙들고 한참을 그대로 자리에 못 박힌다 한 발자국도 도무지 나갈 수가 없다
나는 간절함의 깊이 속으로 사무침 속으로 검은 문장을 메꾸며 들어가는 중이다, 수도(修道)
그건 사랑이었다
한이나 시인 / 거대한 달력의 저쪽
계단으로 된 달력을 본 적이 있다
365일을 동서남북 사면 계단으로 쌓아 올린 마야인의 피라미드 체첸잇차 추분이나 하지에 멕시코 가면 햇빛에 따라 세 시간 더딘 걸음으로 내려오는 날개 달린 뱀 쿠클칸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신전 앞에서 박수를 치면 신성한 새 케찰의 우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인신공양 제물 된 젊은 피, 영혼의 속울음일까
널찍한 돌 위엔 옆 경기장 건장한 우승 남자의 뛰는 심장이 바쳐지고 초경도 하지 않은 앳된 소녀의 목을 바친 피 한 사발
흘러내린 피가 뱀이 되어 용솟음치는 조각으로 제단 신전에 새겨져 있지
내가 오르다가 멈추어 선 계단 한가운데서 시작도 멸망도 수수께끼인 하루아침에 자취 감춘 마야의 천 년 달력 숫자를 세어 보다가 시간을 잃어버리다
0의 발견이다 나는 빈 자리, 새로 탄생할 별 하나다
한이나 시인 / 노독(路毒)
물에 파묻힌 길 찾아 구례 산꼭대기 사성암, 절로 간 소들
새벽마다 울려 퍼지던 절벽 위의 사원 사시 예불 목탁소리의 진동과 진폭을 뜬잠에 자주 들었음이야 마을 외양간에서 통증을 잊고 위로를 받았음이야 장마에 둑 무너져 물바다 된, 혼몽 속 축사 탈출해 장대비 맞으며 오산 자락에 오른 한무리 소들,
아랫마을에서 한 시간 뚜벅뚜벅 걸어 왔을까 간적면에서 문적면까지 이십 리 떠내려가며 헤엄쳐 왔을까 목마름에 찾던 49 선지식 비로소 약효를 알았는지 누구 하나 절마당에서 뛰놀거나 울음소리 내지 않고 얌전히 쉬다가 떠났다,
세상의 한끝에서 마음의 등불을 찾아 어두워져서야 빈손으로 내려왔던 사성암 산속의 먼 길, 굽이도는 구름 길,
소들도 그 어둠을 믿음으로 건넜으리
한이나 시인 / 나 절필해도 좋으리
저, 푸른꽃
초록에 어둑살 깔리는 서하리 산꼭대기 흰 바람개비 옆
푸른 빛의 키 작은 꽃 육십만 평 너른 산비탈을 가득 채운 푸른꽃
가까이 다가가면 모습이 변해 더는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너는, 가까이서는 볼 수 없는 다가가면 멀어지고 마는 시간의 꽃 먼 생 숨은 사랑,
모든 것을 잊고 이랑마다 흙 속에 심어져 저 전심전력, 고랭지 비탈에 피어난 시간이 멈춘 사랑
숨 쉬는 잎과 잎 사이, 겹겹의 속살들 배추 흰 나비 애벌레의 말이 있다 바람개비가 돌리는 밭둑 돌멩이의 온기 꿈속에서 완성된 너,
푸른꽃*을 만난다
*푸른꽃- 독일 시인 노발리스의 미완의 소설로 낭만적 이상의 상징
한이나 시인 / 목련꽃차
찻잔에 꽃이 피었다 밀려둔 목련꽃차를 마셨다 목련의 흰 빛 너무도 단순하여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열정 꽃과 나날들의 기억을 오래 붙잡아두기 위하여 꽃봉오리를 덖고 덖었던 시간들 나를 관통하여 지나갔을 찻잔 속에 가라앉은 꽃숭어리를 본다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다 써버려야 끝이 났을 봄 끝에 떨어진 꽃의 살점들 현재란 어디에 있는 걸까 찻잔 속 꽃으로 그가 내게 왔다
한이나 시인 / 대나무 속 대금소리
담양 죽녹원 대나무 한 그루 마음에 풀어놓고 오래 깊이 대나무통 어둠까지 들여다본다
댓바람에 말갛게 씻은 소리의 푸른 뼈 일필휘지ㅡ筆揮之 대나무통 속 갇혀있던 숨결 불러내어 듣는, 푸른 대금소리 화선지에 저리고 시린 숨결이 곱게 스민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끌어올리는 소리 듣는다 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로 돌아가면서 혼자 묻고 답하며 혼자 어루만지며 쓰다듬는 내 마음속의 대나무, 그 푸른 대금소리.
한이나 시인 / 화염산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풀 한 포기 없다
일제히 수천수만의 불꽃이 하늘로 솟아 올라가는 화염산 산 전체가 불에 싸여 이글거리는 제 몸을 제물로 올리는 소신공양이다
계곡 맞은편 천불동 석굴 벽화에서 빠져나와 뜨거움의 불길 속 꿈쩍 않고 석가모니불 산맥처럼 길게 누워 계신다 천 귀로 듣고 천안으로 보며 미소 짓는.
울지 마라 누가 있어 파초선을 가져와 마흔 아홉 번의 부채질로 화염산의 불을 끄겠는가 바람도 넘어가지 못하고 내려오는 사암 그 붉은 빛 화염의 구경 무아경지!
나는 불타는 산에 불타는 내 사랑을 던져 넣었다
한이나 시인 / 서서 하는 독서
멀어지는 물의 도시에 걸린 석양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걸려 해거름이 한 점 붉다 함께 베네치아에 가자 꿈속의 꿈 헛디딘 말을 위하여 단 하나의 음, 단 하나의 획, 단 하나의 문장을 위하여 이 세상 모든 여행은 내가 나를 그리워한 사랑이다 감정 박물관에 유물로 남은 한 잎의 말이 서천을 붉게 물들인다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다 물길을 타고 낙엽 배 그 물결에 흑해 지브롤타 해협까지 떠내려갈 것이다 포말의 물거품에 한 생애가 섞이며 벗어나며 검은 바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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