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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은숙 시인 / 시인의 일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5.
송은숙 시인 / 시인의 일

송은숙 시인 / 시인의 일

 

 

식당 창가에서 장대한 노을을 보았을 때

저기 노을 좀 봐, 시인 친구한테 말했더니

밥 먹을 때 일 얘기 좀 하지 말라고 하더라나

이런 농담 너무 좋다고 다른 친구는 깔깔 웃었다나

노을을 보고 시인이 하는 일

노을을 캐내고 맛보고 냄새 맡고 감정하고 평하고 달아보고 쥐어짜고 꿰매고 다림질하고 전송하고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노을을 보며 발을 구르고

붉게 부풀어 오른 노을의 발가락을 만년필로 콕콕 찔러보며

몇 개의 문장이 능선으로 지평선으로 내려앉을 때

깃털 같은 그것을 주워 점을 쳐보기

내일 비가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

산등성이로 배를 띄워도 되는지

그래, 이건 일이 맞지

그대 입에 넣어줄 고기를 굽는 것도 일이지

벌겋게 숯불이 피어오를 때 잠깐잠깐 노을을 생각하고

붉은 노을을 보며 잠깐잠깐 바닥에 소복이 쌓인 능소화를 생각하고

나는 지금 노을의 무게를 재고 있어

저울이 오른쪽으로 기울면

오른쪽의 노을을 힘껏 왼쪽으로 밀며

둥글게 둥글게 노을이 번지도록 해

어둠 속에서 오래 불의 기억을 간직하라고

그러니 우리가 후식으로 자몽 주스를 마실 때

다정히 말해 줘

저기, 노을 좀 봐

나는 천천히 감탄할 준비를 하며,

 

 


 

 

송은숙 시인 / 번개의 얼굴

 

 

숲속에서 만난 키 큰 소나무 가슴께가 꺼멓다

나무의 내부로 들어가는 심연의 통로 같다

번개가 온힘을 다해 들이받은 통증

그러니까 저 불의 인장은 번개의 얼굴이라 하겠다

나무의 내부를 훑고 번개가 들여다본 건

수십 수백 개의 방

수백 수천 갈래의 뿌리

두 손을 모으듯, 손가락 끝을 포개듯

저 뿌리와 제 몸을 섞고 싶었을 게다

뿌리의 끝까지 가보고 싶었을 게다

 

그날, 번개가 지나갔다

번개를 맞은 나무는 오래 청정하고

번개를 맞은 사람은 목덜미에

리히텐베르크 무늬*를 새겼다

우주의 에너지를 탐욕스레 흡입하는 붉은 흡반

번개가 제 몸을 복사한 흔적이다

저 문양을 닮은 것은 번개의 일족

질기게 뻗어가는 나무뿌리와

만년설에서 시작된 강의 시원이나

촘촘히 나뭇잎을 갉아먹는 민달팽이의 걸음

그날, 무엇에 놀란 듯 마구 달려가는 고양이의 울음

 

번개는 검고 푸르고 희거나 솟구친 귀처럼 팽팽하다

 

*리히텐베르크 무늬: 번개를 맞은 사람 몸에 남은 번개 같은 무늬

 

-봄시 제10호 어디서 왔는지 모를』, ≪가을≫에서

 

 


 

 

송은숙 시인 / 매달린 것들1

―유리산누에나방의 방

 

 

유리산누에나방 고치가 떡갈나무 잔가지에 매달려 있다

색을 거둔 나무 끝에서 펼쳐 보이는

연두의 둘레가 환하다

반짇고리에서 찾던 비단 골무 같다

골무 끝으로 기워낸 오리나무 어린잎 같다

먼먼 유리산엔 보광(寶光)의 동굴이 있어

석 달 열흘 긴 수련 끝에 굴을 헐고 나오는

어떤 존재를 기리는 고대의 전설

적막한 산에서 만난 시詩의 파편 같은 것

산은 어깨를 움츠린 채 설핏 잠이 들었고

산그늘에서 만난 손가락 두 마디 크기 고치는

매끄러운 유리알과도 같아

유리산의 유리를 가지고 놀기로 한다

투명한 유리, 알록달록한 유리, 차가운 유리, 날카로운 유리

햇살을 반사하는 유리, 뜬구름 같은 유리

유리(琉璃)와 유리(瑠璃)를 가늠하고

유리(有利)와 유리(遊離)를 견주며

유리의 실을 친친 감아 스스로를 가두는

적막한 산에서 만난 유리산누에나방의 방, 같은

시의 안쪽에 거꾸로 매달려서

 

-시집 『만 개의 손을 흔든다』 2021. 파란시선

 

 


 

 

송은숙 시인 / 창窓

 

 

 창窓에는 마음 심자가 박혀 있다 후박나무에 새겨진 지문 같다 의미심장하다 장성을 쌓을 때 쓰러진 백성들의 육편이 벽돌의 어디쯤 점점이 박혀 있을 거라는데 창에 박혀 있는 마음은 언제와 어디서와 누구가 없다 창의 빈 곳에는 언제와 어디서와 누구의 자리일 것이다

 

 어떻게가 이들을 찾아 나선다 사구의 모래를 뒤집어쓰고 염수에 머리칼이 절여지며 화염의 바다를 건넌다 몸이 한 점으로 오그라들며 색이 한곳으로 모인다 낮달을 향해 짓는 개처럼 낯선 골목을 헤매다가 왜를 만난다 왜는 입술이 부르텄다 목이 잠겨 눈빛만 간절하다 대양을 건

너온 바람의 빛이다

 

 땅과 허공의 끝을 돌아 집으로 온다 무엇을이 마중을 나왔다 창틀에 매달려 밖을 본다 후박나무는 칼끝으로 새긴 듯 지문이 깊어졌다 활짝 펴서 흔드는 후박나무 손끝에 하얀 무지개가 걸렸다 어떻게가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

 

 


 

 

송은숙 시인 / 발목에 복숭아나무가

 

 

발가락을 가지런히 하고 석고붕대를 감았다

석고붕대는 왜 초록색일까

나이테를 바깥에 두른 여름 나무 같다

옅은 온기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온다

 

식어가면서 도리어 따뜻해지는 것

굳어가면서 물렁하게 모양을 맞추는 것

발등과 복숭아뼈와 종아리가 나무 안에 갇힌다

저 둥근 것들이 이젠 여름 나이테다

 

복숭아뼈 안에 복숭아씨가 있을까

복숭아씨가 어둠 속에서 반짝 눈을 뜨는지

가만히 싹을 틔우는지

나무 안쪽이 맹렬히 가렵다

 

노승이 꽂아둔 지팡이에서 은행나무 싹이 트고

주춧돌에서 골담초꽃이 피어나듯

목발의 손잡이에도 물관이 돌고 부름켜가 자라고

석고붕대 안의 발가락에선 실뿌리가 나오겠다

 

물을 주지 않아도

발목에 복숭아나무가 무럭무럭 자라고

복숭아나무 뿌리는 발등의 상처를 가만가만 덮어주고

입김 닿는 곳마다 꽃이 필 듯도 하다

 

 


 

 

송은숙 시인 / 캐리어

 

 

캐리어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아스팔트에 갈린 발통이 쓰라렸다

누군가의 팔에 매달리지 않고 저 나름의 이족보행을 한다고 나섰다가

늘 맞고 오는 아이처럼 여기저기 멍이 들었다

 

그러니까 캐리어는 커리어다

순례자는 방문지의 도장을 받아 도장의 이력을 따라간다

몸통에 덕지덕지 이력서를 붙이고

컨베이어 벨트를 빙글빙글 돌며, 나를 빨리데려가 줘요

 

캐리어에 옷가지를 넣고 하염없이 다니는 여자가 있었다

보도블록에 빠졌는지 바퀴 한쪽이 절뚝거리는

그 여자, 캐리어를 눕히고 그 위에 걸터앉아 맛있게 담배를 한대 피우고

세상에, 엉덩이를 받아주는 가방이라니

다시 제 몸만큼 커다란 캐리어를 낑낑거리며 끌고 가던 뒷모습은

서로 얼마나 다정하던지

 

그리고 아이들은 어느 날 캐리어를 끌고 다녔다

몇 가지 옷과 몇 권의 책과 밥공기와 숟가락을 넣고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마

캐리어가 있는 한 캐리어가

자신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한

 

그래서 낯선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빈 캐리어는 창가에서 온종일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늙은 고양이 같겠지

낯선 여인숙 같은 요양병원에서 엄마도 캐리어처럼 우두커니

우리를 기다렸을까

 

나도 캐리어를 하나 장만해야 했다.

재 냄새가 나는 향초를 잔뜩 싣고

절뚝거리며 들어간 창들마다 향초를 하나씩 켜 둔 다음

빈 가방엔 죽은 엄마의 찬합을 싣고 왔다

 

발등이 까지면 발보다 위장이 쓰라렸다는 시절

밥과 반찬을 꾹꾹 눌러 담았으니, 엄마도 드셔보실래요?

 

재활용 차고 옆에 버려진 캐리어를 본다

지퍼가 고장 나 있다

앙다물어 상한 이처럼

 

 


 

 

송은숙 시인 / 측백나무에 별이

 

 

길 끝에서 커다란 측백나무를 만났을 때

키파리소스*의 영혼이 깃든 사이프러스나무가 생각났다

무덤 주위에 심는 늘 푸른 나무처럼

서쪽으로 몸을 돌린 측백나무

먼발치에 솟은 산 전체가 이미 둥근 묘역이다

거대한 판테온으로 하얀 밤이 스며들고

검푸른 몸통이 발을 끌며 하늘로 올라간다

나무의 뿌리가 건져 올린 영혼은

회오리바람처럼 타오르는 불꽃처럼 나무를 감고 오른다

크리스마스 나무에 별을 매달 듯 한 영혼이 가지에 오를 때마다 나무는 별을 내건다

나무의 어깨에 매달린 푸르스름한 별들, 울퉁불퉁한 구릉과 골짜기와 산들

작은 구과에 엘리시온 평원**이 펼쳐져 있다

구과는 물기 많은 지구를 복사했다 골짜기와 구릉과 평원을

그곳에도 길 끝에 사이프러스를 닮은 커다란 측백나무가 있고

발치에 둥근 묘지 같은 산이 솟아있고

측백나무 어깨에 푸른 별이, 복사된 지구가 매달려있고

그 안에 다시 커다란 측백나무가, 묘지를 닮은 산이, 지구를 복사한 푸른 별들이

극미의 무한 속으로 빨려 들어간 영혼은

안테나처럼 뾰족한 측백나무 우듬지에서 우주의 영혼들과 조우한다

그들이 주고받는 불가해한 음역대가 안개처럼 산을 두르고

나무가 뿜어내는 음音의 알갱이마다

복사된 지구가, 커다란 측백나무가, 길 끝에

 

* 그리스신화에 따르면 사이프러스나무는 아끼던 수사슴의 죽음을 슬퍼한 키파리소스가 변하여 된 나무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했던, 죽은 뒤에 영혼이 머무는 곳

 

 


 

송은숙 시인

대전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사학과 졸업. 울산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수료. 2004년 《시사사》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2017년 [시에]로 수필 부문에 등단. 시집 『돌 속의 물고기』 『얼음의 역사』. 산문집 『골목은 둥글다』, 현재 〈화요문학〉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