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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영수 시인 / 책에게 구걸하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4.
한영수 시인 / 책에게 구걸하다

한영수 시인 / 책에게 구걸하다

 

 

지하도 입구

걸인이 책을 읽는다

모자를 벗어 뒤집어놓고

 

점점 코를 박는다

책이 되어 책에게

구걸하고 앉았다

 

책은 뒤통수가 커다랗고

가리키는 것이 많고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해진 외투자락 모래 한 알에서

간밤의 사하라를 읽는다*

다음 문장은 무엇입니까?

 

행인1 걸음이 느려진다

동전 몇 개 모자 속에 떨어진다

행인 2 돌아본다

 

금방 지하에서 나왔는가

들어가기 직전인가

비명인가 가라앉는 돌덩이인가

 

눈으로는 읽을 수 없다

중간만 남아 실금이 많은 책은

 

손으로 두드려서

귀로 들을 수 있고

 

*W. G. 제발트 〈토성의 고리〉

 

 


 

 

한영수 시인 / 굴뚝새

 

 

우리가 동의하는 높이

굴뚝 위에 새는 있다

 

아니오

아니오

최소한으로 운다

물 한 모금 네 걸음에

굴뚝 한 바퀴

 

검고 가는 발목이다

단독자의 맨발이다

벌써 굴뚝의 일부가 되어있는 새

왜 정확하게 새가 아닌가

 

날개는 짧고

굴뚝은 계속된다

새 이야기를 이야기하다가

불뚝, 추운 높이

갇혔다

굴뚝 쪽으로 더 가버린 새

 

아니오

아니오

굴뚝이 돈다

울창한 굴뚝을 돈다

 

 


 

 

한영수 시인 / 눈송이에 방을 들였다

 

 

이것은 밀물이다

이것은 썰물이다

 

나는 발목이 바쁜 시녀

지금 묻어오는 달빛을 허락한다

 

어깨가 당겨지면

손마디를 푼다

팔꿈치를 조금 늘어뜨리고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한다

 

개를 끌고 가다

목줄을 놓고

안쪽으로 돌아도

바깥으로 돌아도

 

공주는 공주

시녀는 시녀

 

달빛 계단에

무릎이 꺾인다

주저앉을 때마다

주저 없이 일으켜 세워진다

 

나를 가둔 이는 등 뒤에 서 있다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는, 어쩌면

나를 닮은 모습으로 내가 만들어 놓은 신

 

정해진 줄 위에서 나는 나를 겪어 낸다

 

 


 

 

한영수 시인 / 습관

 

 

처음 보는 아침이야

가슴의 비늘을 세워본다

머리로 꼬리로 밀어본다

전진하기에 조금 긴 몸

요동치기에 조금 무거운 생각

들판을 가로지른다 개울을 헤엄쳐

그물망을 뚫고 저기

바람해변 솔밭에 내리는 기쁜 햇살까지

가고 간다 제자리 뛰기다

쫓아오는 바퀴에 순간

뭉개진 길이다

쫓겨보면 알지

오히려 안도하는 표정

황갈색 가로줄무늬를 지우며 납작

화석이 되어야 하는데

누룩뱀 한 마리

악착같이 꿈틀거려본다

끈이 풀렸는데도

기던 그대로

긴 아침을 기고 있다

처음 가는 곳은 언제나 멀지

구불텅구불텅 바닥에 엉겨 붙어

방금 바닥이 되어버린 것을 모른다

 

 


 

 

한영수 시인 / 밤새 자작나무를 탔다

 

 

시간은 있었다

달과 별이 움직이는 동안

 

바라보았다

뒤돌아보았다

손을 쥐었다

풀었다

말을 못하는

 

시간은 있었다

 

가슴이며 옆구리며 종아리로도 흰 빛

벙어리였다 나는

빈 종이

한 장이었다

 

극도로 넓은 범위

적에서 청으로

청에서 녹으로

일일이 거꾸로

 

모든 목소리였다

 

 


 

 

한영수 시인 / 조연

 

 

 돌 하나가 날아왔다 무엇을 바로 보자는 걸까

 

 왼손 안에 꼭 쥐어졌고 그만한 정도의 침묵이 심장을 눌렀다

 

 처음에는 영화나 보자는 것이었다 장발장으로 오래 익숙한 이야기였다

 

 조명이 밝아지고 해피엔딩에 안심해야 하는데

 에포닌 생각이 생각을 키웠다 바리케이트 아래 핏물이 흐르고 갈 곳을 버린 노래가 주위를 맴돌았다

 

 고흐보다는 동생 테오가 마리아보다는 부엌데기 마르타가 말하자면 진열대 뒷줄에서 시들어가는 시들의 무수한 시간이 돌무지처럼 서로를 괸 심장에

 

 붉은 돌이 앉았다 말로는 다 못하겠다는 말을 들고

 

 


 

 

한영수 시인 / 피어도 되겠습니까-동백

 

 

충분히 불안합니다

 

순간 쏟아질 한 사발 피에

아름다움이 붐빕니다

 

빨강의 내부를 열고

들어가 더 완고한 빨강에서

베어 문 빛깔로

지배받지 않는

단어로

 

꽃 피어도 되겠습니까

 

겨울로 격리된

심장한 덩이

변방을 두드려 댑니다

아우성치며 눈발이 때를 맞추는

 

이런 밤에

이런 밤에

 

꽃을 가진 겨울에 대하여

겨울을 가진 꽃에 대하여

 

한마디 넘쳐도 되겠습니까

 

 


 

한영수 시인

1957년 전북 남원 출생. 2010년 《서정시학》에 〈시칠리아의 암소〉 외 3편을 발표하며 문단활동 시작. 시집 『케냐의 장미』 『꽃의 좌표』 『눈송이에 방을 들였다』 『피어도 되겠습니까』. 2005년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창작기금 수혜. 2015년 세종문학나눔도서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