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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명원 시인 / 치통이 오는 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1.
한명원 시인 / 치통이 오는 밤

한명원 시인 / 치통이 오는 밤

 

 

 자연사 박물관엔 멸종의 이름들이 많다. 살은 다 썩어서 멸종되고 흰 뼈들만 남아있다. 벽에는 물고기가 물고기 뼈들로 벽을 헤엄쳐 다니고 익룡의 뼈가 천장 위를 날아다닌다.

 

 살이 없으니 고정이다. 저 뼈들은 고정의 힘으로 몇 백 년은 더 살아있을 것이다.

 

 생명 진화관 입구에서 나비 떼가 몰려있다. 어느 화창한 봄날에서 한 뼘도 날아가지 않은, 꽃의 주위다.

 

 곳곳에 맹수들이 노려본다. 나뭇가지 위에 잘생긴 표범의 이빨을 보는 순간 충치가 생긴 어금니가 생각났다. 뾰족한 열음치가 튼튼해 보였다. 표범이 조는 틈을 타 얼른 손을 유리창 너머로 뻗어 표범의 열음치를 빼서 내 어금니와 바꾼다.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이빨이 근질거리고 허기가 진다. 야성이 느껴지며 목젖에서 짧은 욕설이 튀어 나온다.

 

 여전히 따라오는 공룡, 뼈들이 와르르 무너진다.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다.

 박물관을 나와 집으로 향한다. 집이야말로 우후죽순의 박물관이다.

 

냉 장고 문을 거칠게 연다. 날카롭고 뾰족해지는 식사. 집안 어디를 찾아봐도 야채는 보이지 않는다. 묽은 육즙의 고기들을 꺼내들고 뜯어먹기 시작한다. 이빨 사이로 흐르는 핏물, 갑자기 가슴이 간지럽더니 젖꼭지가 여섯 개나 생긴다. 창밖 달을 바라보며 긴 소리를 지른다.

 

 피를 먹는 밤, 크고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먹는 밤, 입안이 아프다. 아픔으로 배를 채우는 밤, 그런 날이면 이빨이 우지끈거린다. 치통이다. 눈이 번쩍 떠진다. 입안에서 맹수들이 우르르 빠져 나간다.

 

-「시와 표현」2013년 여름호

 

 


 

 

한명원 시인 / 몽유안夢遊眼

 

 

 엄마가 외출하면 눈동자를 밖으로 내보낸다

 밖으로 나간 눈동자가 창문을 들여다본다

 

 금발머리 인형에겐 여분의 눈동자가 있다 아이는 눈 없는 말을 인형의 귀속에 넣어준다 속삭이는 말투로 꽃들이 피어났다

 

 이제 저 현관문은 열리지 않아 안에서 두드리면 밖에서는 열 수가 없지 우리는 이곳에 갇혔어 너의 눈알이 빠진 것을 엄마는 몰라 어쩌면 네 얼굴을 바꿀지도 몰라 걱정 같은 건 하지 마 말랑한 벽엔 언제나 시간이 묻어 있으니까

 

 엄마는 열쇠 없는 말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

 우리는 더 많은 눈알을 모아야 해

 뻐꾸기가 벽에서 나올 때마다 숫자들이 부화한다

 액자 속에 구름이 둥둥 떠 있다

 

 숫자들이 날아가고 있어

 꽃병 만의 꽃들도 다 날아갔어

 이제 눈 밖으로 나가야겠어

 아이는 눈을 열고 문을 꺼내 시간을 진열한다

 

 뻐꾸기가 낳은 시간들이 날아가고 빈 시계가 자정을 알리고 딸각 현관문은 열리고 불안

이 가득 들어와 쉰다

 아이도 인형도 현관문도 시간도 모두 눈을 감고 잠들고

 여분의 눈알들은 몽유夢遊에 모여 논다

 

 


 

 

한명원 시인 / 치통이 오는 밤

 

 

 자연사 박물관엔 멸종의 이름들이 많다. 살은 다 썩어서 멸종되고 흰 뼈들만 남아있다. 벽에는 물고기가 물고기 뼈들로 벽을 헤엄쳐 다니고 익룡의 뼈가 천장 위를 날아다닌다.

 

 살이 없으니 고정이다.

 저 뼈들은 고정의 힘으로 몇 백 년은 더 살아있을 것이다.

 

 생명 진화관 입구에서 나비 떼가 몰려있다. 어느 화창한 봄날에서 한 뼘도 날아가지 않은, 꽃의 주위다.

 

 곳곳에 맹수들이 노려본다. 나뭇가지 위에 잘생긴 표범의 이빨을 보는 순간 충치가 생긴 어금니가 생각났다. 뾰족한 열음치가 튼튼해 보였다. 표범이 조는 틈을 타 얼른 손을 유리창 너머로 뻗어 표범의 열음치를 빼서 내 어금니와 바꾼다.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이빨이 근질거리고 허기가 진다. 야성이 느껴지며 목젖에서 짧은 욕설이 튀어 나온다.

 

 여전히 따라오는 공룡, 뼈들이 와르르 무너진다.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다.

 박물관을 나와 집으로 향한다. 집이야말로 우후죽순의 박물관이다.

 

 냉장고 문을 거칠게 연다. 날카롭고 뾰족해지는 식사. 집안 어디를 찾아봐도 야채는 보이지 않는다. 묽은 육즙의 고기들을 꺼내들고 뜯어먹기 시작한다. 이빨 사이로 흐르는 핏물, 갑자기 가슴이 간지럽더니 젖꼭지가 여섯 개나 생긴다. 창밖 달을 바라보며 긴 소리를 지른다.

 

 피를 먹는 밤, 크고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먹는 밤, 입안이 아프다. 아픔으로 배를 채우는 밤, 그런 날이면 이빨이 우지끈거린다. 치통이다. 눈이 번쩍 떠진다. 입안에서 맹수들이 우르르 빠져 나간다.

 

- <시와 표현> 2013년 여름호

 

 


 

 

한명원 시인 / 사냥일지

 

 

 강물의 곡선이 거대한 포식자에게 먹히고 있다 저것은 금속동물, 검은 지층을 먹고 살지

 

 언제부터 금속의 입과 위장으로 강과 갈대와 작은 피라미들과 몇 백 년을 흘러온 저 물소리가 밥이 되었나

 

 유전자의 변종

 군데군데 깊은 웅덩이를 보면 탁한 식사와 깊은 식욕을 알 수 있지

 물의 기슭과 은빛 햇살들을

 한입으로 먹어치운다

 

 파괴의 식사로 유지되는 육중한 몸뚱이, 물새둥지며 갈대숲을 통 째로 먹는 잡식의 포식자가 오늘은 시동을 끄고 한낮의 포만을 즐기 고 있다

 

 파괴된 먹이사슬의 검은 배설물은

 슬금슬금 구름 속으로 파고들지

 

 빛이 서서히 고요 속으로 가라앉을 때 녹슬어 있는 굴착기 삽날에 서 핏기가 번쩍인다. 이빨에 찍힌 것들을 소화시키기 위해 식사를 마친 저단의 속도가 어슬렁어슬렁 걸어간다

 

 언제까지 멈출 수 없는 사냥이

 회전판 버킷을 안고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한명원 시인 / 엘리자베타 게라르디니*의 여행

 

 

 세상에 얼굴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세상에 얼굴을 수집하는 얼굴이 있었다.

 

 혹은, 한때 여행자였다고 한다.

 

 뒷문을 열어준 누군가를 따라 이곳저곳을 여행한 적이 있다.

 창문을 넘어 경비행기를 타고 사라졌다는 후일담과 배경으로 들어간 길을 따라 구불 구불한 여행이었다고 한다.

 스스로 사주한 도난이었을 것이라는 소문과

 배후로 지목되는 것은 공기 원근법이라는 소문 또한 있다.

 

 후일 수천 개의 펜촉과 잉크병들이 먼지와 수증기를 뚫고 행적을 되짚었다고 한다.

 

 골동품 가게들이 보이고 유난히 불룩한 유리창 안에서 그녀는 배를 햇볕이불로 덮고 왼쪽의 시선으로 거리의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다. 선과 선이 부딪치는 표정, 아마 뱃속 의 아이에게 태어날 아이에게 미소를 알려주려는 듯.

 

 어쩌다 얼굴을 마주보는 화형이 되었을까

 미소의 관 속에 오래 앉아 있는 화형刑을 견디고 있을까

 

 가끔, 엘리자베타 게라르디니라는 본명을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다

 귀를 기울여 미소 뒤 요람 속

 아이 울음소리를 들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도난을 도모하고 싶다는 듯

 어서 이 웃음이 밖으로 다 낡아 갈 날을 기다린다는 듯.

 

*엘리자베타 게라르디니 :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본명.

 

 


 

 

한명원 시인 / 얼룩말

 

 

어느 날부터 천정에 얼룩말 한 마리가 살고 있다

히힝 거리는 소리를 잃어버렸는지

말발굽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언제부터 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모서리 끝에서 출발하여 중앙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곤두선 털엔 바람이 빳빳하게 들어있다

자세히 보면 반대쪽 모서리에서도

이제 막 새끼 얼룩말 한 마리가 태어나고 있는 것도 보인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먼지가 바닥에 덮여 있고 말은 조금 더 살이 쪄 있다

자잘한 잔 꽃무늬의 풀들을 뜯고 있는

줄무늬가 희미하게 보인다

방안에 반듯이 누워있는 것 같지만

사실 저 날뛰는 얼룩말 잔등에 엎드려 있는 것 같은 반지하 방

아주 오래 전 이 방은

말들이 뛰놀던 목책이 둘러져있던 자리였는지 모른다

여름이 장마의 울타리 안에서 머뭇거리고

어느새 얼룩말은 형광등 근처까지 몰려와 있다

맹수라도 뒤따라오는지 혹은,

물웅덩이를 지나는지 가끔 물방울이 떨어진다

어쩌면 목이라도 물린지 몰라

더 많이 두둑거리며 떨어지는 물방울 혹은 핏방울

지열은 더 눅눅하게 치솟고

얼룩말은 웅덩이와 맹수를 피해 어느 들판을 달리고 있는 걸까

우기의 들판,내가 누우면 이내 멈춰서는

큰 얼룩말 한 마리가 살고 있다

 

-계간《시산맥》 2012,여름호

 

 


 

 

한명원 시인 / 정장씨와 추리닝 씨

 

이력의 기술을 적는 법을 수백 장 연습한다

 

눈치 잘 보는 법, 거울을 보며 웃는 법

잘생긴 대답, 아이오우, 아이오우

랩(rap)처럼 둥근 소리가 창문을 흔들고

수만 가지 얼굴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평상시를 함께 하지 못하는 정장 씨

추리닝 씨의 얼굴에 다른 가면을 쓰고

면접 번호를 받는다

머리를 쪼고 쪼며 연습한 대로, 침착하게

요령을 찾고 말의 대역을 찾는다

 

방안에는 정장 씨와 반듯한 면접 씨와

헐렁한 추리닝 씨가 공존한다

정장 씨 오늘따라 추리닝 씨와 닮지 않은

과거를 뱉으며 확신에 찬 미래를 위해

몸을 날리며 면접 씨가 된다

눈빛은 상대의 눈을 뚫어버릴 듯하다

 

이력의 기술을 (rap)처럼

본문 24페이지에서 34페이지 사이에

기록하고 종이 한 장이 넘어간다

본문 두 장, 세장이 넘어가도

스펙만 여전히 쌓고 있다고 기록된다

 

-『모던포엠』 2020. 6월호에서

 

 


 

한명원 시인

1965년 서울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교 문예창작전문가 과정. 201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시집 『거절하는 몇 가지 방법』.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수혜. 2020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현재 기업체 인문학 강사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