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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금용 시인 / 파란 대문집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0.
김금용 시인 / 파란 대문집

김금용 시인 / 파란 대문집

 

 

서쪽이 빨갛게 익은 노을을 불러내도

동쪽의 푸른 아침이 날 깨워줘서

파란 대문집 여학생으로 불러주는 걸 좋아했다

 

벽에 너울거리는 그림자까지

담뱃불 안에 끌어 모아

내게 따뜻한 빛을 건네주던

아버지 닮은

담배 피우는 남자를 사랑했다

 

동향집은 춥고 그림자가 길었지만

노을을 쫓는 어둠이 저녁연기에 그슬리면

강 너머로 길 떠난 동생이 눈에 밟혀

서쪽 창엔 커튼을 늘어뜨리고

겨울을 나는 콩새에 귀를 기울였다

단풍나무 그림자가 붉어지면

씨앗을 따먹으러 일곱 살 동생처럼 파란

대문 담장을 뛰어오르는 콩새

 

쓸데없이 길어지는 우울증을 벗어나려고

콩새처럼 동에서 서쪽으로

다시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날개를 폈다

 

동향집은 빛이 짧아서 꽃 피우기가 힘들지만

동쪽은 푸른 빛이 많다고 믿어서

노을이 내 방 커튼을 젖히며 밀려들어도

나는 파란 대문집 여학생이었다

 

 


 

 

김금용 시인 / 낙타가시풀

 

 

목구멍 속까지 침이 말라버린

노쇠한 낙타 한 마리

메마른 낙타가시풀을 씹어 삼킨다

 

살아 있어야

시작되는 모든 것들

 

혀에 꽂히는 가시풀에 피 흘리면서도

모래가루 붙은 속눈썹 너머로

열사에 뿌옇게 지워진 오아시스를 찾는다

무릎 베고 잠들 짝의 그림자를 찾는다

 

 


 

 

김금용 시인 / 각을 끌어안는다

 

 

가파른 산 위로 오를수록

너럭바위가 팔 뻗쳐 길을 막는다

제 안에 각을 부수고

잡아당긴다 끌어안는다

말 건넨 적 없고 표정도 없지만

긴 팔이 쭉 나온다

길 잃은 이들을 불러들인다

호주머니에서 삐져나오는 카드 영수증

연락 두절된 전화번호와 전하지 못한 쪽지,

비집고 나올 공간을 찾지 못해

귀갓길에 운전대를 잡고 내지르는 비명,

다 털어 버리라고 잡아당긴다

 

너럭바위가 각진 모서리를 끌어안는다

빗물과 짠 눈물 바람으로 닳도록 두들겨

수직과 수평 틈으로 링거 병을 꽂는다

진달래와 얼레지꽃, 붉은 병꽃과 손을 잡는다

황사에 미세먼지에 앞길이 막막해도

도봉산 청계산 관악산 산마다

비집고 들어갈 뜨거운 혈을 만든다

각이 무너진다

진달래 얼레지 산벚꽃 둘레길이 열린다

앞길이 뚫린다

 

 


 

 

김금용 시인 / 떡가루비 내리는 한가위

 

 

가는 비 내리는 한가위 전날,

중국인 조선족 아낙네들

흑룡강 햅쌀로 송편을 빚는다

평상 한편에서 곰방대 피우시던 조선족 시아버지

넌지시 말씀 하나 보태신다

 

보름달 못 본다고 서러워 마라, 이 비는 떡비야, 떡비

봄에는 일하라고 내리는 일비

여름에는 잠시 쉬어 낮잠 자라고 내리는 잠비

겨울에는 농한기이니 술 마시라고 술비가 내려서

지아비와 제때 눈 한 번 마주치기가 어렵지만

한가위에 내리는 이 비는

가을걷이 뒤, 떡 해먹고 일찍 자라고 내리는 비거든

그 덕에 자식 만들기 좋은 꿀비지,

농사짓기 딱 좋은 단비가 내릴 때

농군들은 목 빼고 기다리지, 모내기 때 내리는 못비를

때론 심술 맞은 여우비, 바람비, 도둑비에

마른비, 잔비, 실비, 싸락비, 날비, 발비, 작달비, 달구비,

거기에 건들장마, 우레비까지 시비를 걸어오지만

뭐니 뭐니 해도 떡비 때문에 또 한 해 넘어가지

그렇지, 고루고루 떡시루 가루가 내려오니까 말야

 

시아버지의 곰방대를 빠져나온 담배 연기가

가루비에 섞여 동글게 송편을 빚는다

송편 솔향이 이웃 중국집들 사이를 빠져나간다

지아비 지어미 모두 한국으로 가 버린

조선족 아이도 솔향 따라 굴뚝 너머를 울려다본다

부모 얼굴 섞여 내리는 가루비를

 

 


 

 

김금용 시인 / 오월의 숲에 들면

 

 

어지러워라

자유로워라

신기가 넘쳐 눈과 귀가 시끄러운

오월의 숲엘 들어서면

 

까치발로 뛰어다니는 딱따구리 아기새들

까르르 뒤로 넘어지는 여린 버드나무 잎새들

얕은 바람결에도 어지러운 듯

어깨로 목덜미로 쓰러지는 산딸나무 꽃잎들

 

수다스러워라

짓궂어라

한데 어울려 사는 법을

막 터득한 오월의 숲엘 들어서면

 

물기 떨어지는 햇살의 발장단에 맞춰

막 씻은 하얀 발뒤꿈치로 자박자박 내려가는 냇물

산사람들이 알아챌까 봐

시침 떼고 도넛처럼 꽈리를 튼 도롱뇽 알더미들

도롱뇽 알더미를 덮어주려 합세하여 누운

하얀 아카시아 찔레 조팝과 이팝꽃 무더기들

홀로 무너져 내리는 무덤들조차

오랑캐꽃과 아기똥풀 꽃더미에 쌓여

푸르게 제 그림자 키워가는 오월의 숲

 

몽롱하여라

여울져라

구름밭을 뒹굴다

둥근 얼굴이 되는

오월의 숲엘 들어서면

 

 


 

 

김금용 시인 / 제멋대로

 

 

암자 한복판에 우뚝 솟은 측백나무 한 그루

 

우람하니 잘 컸네요, 했더니

스님이 되묻는다

저 나무가 왜 잘 자랐는지 아는가

제멋대로 둬서야

 

생긴 대로

흐르게 두어서,

 

진돗개 한 마리도

낯선 발소리 아랑곳 않고

나무 아래 네 다리 뻗은 채 자고 있다

 

-《문학과창작》 2022. 여름

 

 


 

 

김금용 시인 / 담쟁이, 너의 발랄한 옥빛

 

 

왜 너를 보면 아플까

너의 발랄한 옥빛이

간지럼 잘 타는 너의 웃음소리가

풍랑이 일던 어젯밤의 두려움을 거뜬히 넘기고

막 세수한 뽀얀 얼굴로 콘크리트 벽을 부드럽게 감싸니

기적인가, 물기가 스민다

 

발걸음 멈추고

네 두 팔 두 다리 벌려 춤추며 그려놓은 푸른 세상을 바라본다

너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렸던 것일까

비바람을 이겨내고 지어놓은 푸른 옷 한 벌이 펼쳐진다

눈썰미 좋은 지하 방 수선집 할아버지도

크게 두 팔 벌려 가로세로 크기를 가늠해보는데

콘크리트 벽 틈바구니로 엄지손톱만한 잎을 내밀고

저마다 햇살 받쳐 들고 푸른 손짓을 하고 있으니

너로부터 꿈이 자라는 줄 알겠다

빛이 넘치는 옥탑방에서 어둠이 넘치는 지하방까지

푸른 농담을 던지는 담쟁이넝쿨,

이 악물고 달려왔을 네 열정에 목이 잠긴다

 

나이를 먹고도 사랑이 뭔지 모르겠지만

녹주석 빛 울렁증에 심장이 춤추는 걸 보면

시린 사랑이라는 걸 알겠다

널 보면 아프다

 

 


 

 

김금용 시인 / 혹惑

 

 

 환풍기가 돌아간다 소리가 몰고온 찐득한 바람이 소설책을 뒤적인다 주인공을 바꿔놓았는지 돌아가는 환풍기 따라 꿈이 바뀐다 엄마를 가운데 앉혀드리고 꿈을 따라 언덕 위로 차를 모는데 꽈리를 튼 생각뭉치가 바퀴에 걸려 실이 끊어진다 의식이 껴드는 통에 엄마는 사라지고 내 꿈은 꼬리가 잘린 채 달아난다 며칠째 그 꿈의 끝이 어디였는지 궁리해 본다 도착지를 찾아 꿈속 언덕길로 진입해본다

 큰 괄호를 펼친 채 널브러진 A4 백지가 동굴처럼 두 팔을 벌린다

 눈발 쏟아지는 벌판, 시작이 틀렸을까 꿈 어디에도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없다 혹 계속 가야하는지 엄마에게 묻고 싶은데, 나는 혼자여서 주인공을 바꿀 수가 없다

 

-계간 『유심』 2024년 봄호 발표

 

 


 

 

김금용 시인 / 남기는 말씀

 

 

나비가, 흰나비가 어깨를 친다

고개 떨군 슬픔의 무게만큼 무겁게

코끝을 스치며 날개를 흔든다

걱정하지마

봄햇살이 따뜻하게 감싸니깐

난 흰나비가 되었거든

구름 밖으로 날아갈 거니깐

굵은 못 꽝꽝 박은 목관 틈새를 뚫고

가볍게 어둠을 벗어날테니깐

 

괜찮아

농담하듯 짓궂게 내 어깨를 치는 나비,

대꾸도 없이 도망치기만 했음에도

등 뒤로 숨기만 했음에도

당돌하게 대들던 내 화살촉 말들이

빗줄기 요란한 퍼포먼스였다고 덕담을 해주네

젊은 치기도 주관 뚜렷해서 반가웠다고

내 머리를 쓰다듬네

 

미안해 하지마,

날 딛고 일어서는 널 지켜주고 싶네

삶에 끌려 욕심부린 날들은 무명지에 둘둘 말아서

화장터에서 함께 태워버리게나

재가 된 내 뼛가루는 가볍게 강물에 날려버리게나

항아리에 넣어 다시 땅에 묻지 말게나

미련 없이 털고 날아갈 수 있도록

날개에 힘이 붙도록

내 이름조차 비어주게나

날 부디 잊게나, 잊어주게나

 

-엔솔로지 현대시학 <포엠하우스> 2024년 수록

 

 


 

 

김금용 시인 / 혁명일지 모르지

 

 

석 달 열흘 울음덩어리를 끌어안고 있었지

얼어붙은 물기둥 안에서 터질 때를 기다렸지

내 안의 환호 소리가 간곡해서 견딜 수 있었지

절정은 순간이지만, 솟구칠 분수의 화려한 절망으로 설레었지

떨어지는 가속도 속에선

기다림도 그리움도 속절없는 부재인 것을

갈망의 끝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모르지

제 몸을 부숴버리는 쌍욕지꺼리를 어떻게든 듣고 싶은 거지

누구는 분수分手를 지키지 못한다고 수근거릴지 모르지만

 

공자가 험한 폭포로 떨어졌다가 헤엄쳐 나온 사내에게

물에도 도가 있는가, 물어봄에

물엔 도가 없고

단지 물에 나를 맡기고

세게 혹은 여리게 출렁이며, 흘러가며

떠오르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소, 말했다지

사납게 내리꽂히는 저 울부짖음은

내 안의 나를 꺼내본 적 없는

나로서는 혁명일지 모르지

분수分手에 넘치는 아우성에 몸을 웅크릴 때

두 팔 높이 치켜들고 분수噴水, 너를 따라 소리치겠지

나를 가둔 분수分手를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계간 『시와 사상』 2024년 봄호 발표

 

 


 

김금용 시인

1953년 서울에서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중국 북경 중앙민족대학원 석사 졸업. 1997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 『광화문 쟈콥』 『넘치는 그늘 』 『핏줄은 따스하다, 아프다』 등. 펜번역문학상. 동국문학상 수상. 현재 한국시인협회, 국제펜클럽 회원. 현대시학 편집주간 역임. 현재 계간《시결》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