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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원경 시인 / 물의 진화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0.
김원경 시인 / 물의 진화

김원경 시인 / 물의 진화

 

 

체온을 가둔 빛의 표정이 물위를 돌아다니고

이것은 세계에 대한 진지한 시술

 

빈방에 희미하게 들리는

강물소리를 걷는다

 

여기에 앉아 있으면

이미 도착한 물결이 다른 물결을 잡고 있다

 

나는 곧,

소리에 고인다

 

소금쟁이가 다리를 떨면서 걸어가는 소리

네가 아이였을 때 냈던 웃음소리

물수제비가 건너며 내는 파문의 소리

사라진 물고기의 숨소리

 

한 마리 새가 물 마시던 강 옆에서

물의 억양은 창백하다

 

그것은 주름진 피부였고

하나였다가 여럿이었다가 다시 하나가 되는

 

녹초들은 미끄러지고

금빛 모래는 입을 막고 울고 있다

 

다만 너에게 이것은 추측이라는 사실,

 

주파수를 돌려보내는 물의 신음소리

창백한 안료들이 내 얼굴에 고인다

 

젖은 공간에서

하나의 몸이었다가 여러 개의 몸이 끓고 있다

 

가장 멀리서 만난 파장 위로

가장 나중에 기록되는 울음들이 있다

 

-계간 『열린시학』 (2010, 가을호)

 

 


 

 

김원경 시인 / 불면증

 

 

한 계절을 통과할 때마다

나는 며칠씩 불면증으로 거처를 잃어버리곤 했다

빗물을 가둔 저녁노을처럼

우울한 색상의 안료를 여기저기 덧칠하며

난청을 앓고 있는 구역에 들어갔다

그런 날은 촉수를 세워 우주 어딘가를

혹성처럼 떠돌고 있을

나의 통점들을 조용히 매만지곤 했다

어두운 부분들이 만든 통점을 지나쳐야만

비로소 나는 나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얼마나 더 견뎌야 이 세상을 잊을 수 있을까?

태풍의 눈으로 걸어들어간 최승자처럼

생은 항상 나침반처럼 한 방향만을

자신의 거처로 삼게 했다

어쩌면 운명이라는 것 자체가

패키지 여행의 한 부분, 아니

패키지 여행의 모든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지나온 궤도을 추적하는 동안

밤하늘의 별들은

비명을 지르며 모두 떨어지고 있었다

한점 열을 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열로 만들어야 했다

별이 추락하면서 자신의 환부를 드러내듯

나는 한 음계씩 울음의 온도를 높여서

나를 드러내야 했다

존재에 대한 이 진지한 시술이 끝나면

나는 내가 냈던 모든 울음의 소리를 끓여

앞으로 내가 지나가야 할

불멸의 지도를 완성할 것이다

 

 


 

 

김원경 시인 / 어느 연약한 짐승의 죽음

 

 

벽에 걸린 젖은 수건처럼

밤새 앓던 몸이 허공에 가죽을 내려놓을 때

나는 공기를 타고 몸을 찢는 수증기가 되어

거대한 숲의 뇌수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의 파장을 끓여 짐승의 냄새를 지우면

자잘한 뼈들이 촛농처럼 떨아지고

겨울 숲은 환한 울음소리를 내며 발목을 끌며 지나갔다

 

목탄으로 덧칠한 나의 대문으로

나를 초대했던 당신이 빠져나갔다

울창하게 자란 도시의 검은 협곡을 떠메고

나를 버려놓은 당신이 빠져나갔다

 

그럴 때마다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로 가

떼지어 제 뼈를 묻는다는 어느 짐승처럼

날마다 자라는 송곳니를 분질러

깊고 고요한 솟에 묻어 두었다가

비밀스런 상처를 덮어주곤 했다

 

아득한 외로움이 폭설처럼 내리는 날이면

밀서를 전달하듯

참혹한 활자를 뱉어냈다

아찔하고 황홀한 절벽 아래

내 안의 검은 밤바다가

몸을 풀며 출렁이고 있었다

약간의 독이 맛있다며 야금야금

밀어(密語)를 뜯어먹고

 

차가운 밀어가 만들어낸 불온한 합주가 끝나면

나는 살아서 묘비명을 쓰다 죽을 것이다

이 병이 나를 영영 버려놓는 순간까지

 

 


 

 

김원경 시인 / 식물원

 

 

새집으로 이사하는 날

잎이 두툼한 고무나무 한 그루가 배달되어 왔다

'祝 이사'는 리본에 붙들려 달아날 궁리를 하는데

나무는 자신의 신상명세서를 꽉 쥐고 내 앞에 섰다

식물도 어떠한 기능을 가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던지거나 밟히는 일이 잦아 절대취급주의를 알리는 여기

발붙이는 일에도 요건은 필요했을 것이다

아니다, 기능성은 세계가 호명한 분류에 불과하다고나 할까

나르다가 긁힌 약간의 상처에도

고무나무는 쉬이 수액을 쏟아낸다

이사가 끝났는데도 잠은 짐을 풀지 못하고

새집은 공기의 빈 젖을 내민다

숨의 표면이 고르지 않아 나는

자꾸 헛기침을 했고 아버지는

새집증후군이라 했다

서울행 우등버스를 기다리는데

말더듬이 아버지가 딱따구리가 되어

코 베 가 는 데 가 서 울 이 데 이

가습기 같은 더운 입김이 꺾은선 그래프를 찍어댄다

나는 입을 막고 달린다

숨이 가라앉자 어디서 펌프질 소리가 났다

아령을 들어 힘을 기르듯

라마즈 호흡법으로 분만을 기다리듯

후, 후, 후-우

고무나무가 내력을 알 수 없는

미세한 물질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독을 마셔서 무럭무럭 자라는 저 초록의 우량아들

 

 


 

 

김원경 시인 / 울음의 속성

​얼룩고양이의 주름진 울음이

골목길 여기저기 탄산수처럼 터진다

울음에 질식한다는 것은

사랑이 위태로운 사람들의

건조한 속어일 뿐,

하지만 난 가끔 음표를 새기기 전

발가벗은 호수가 되기도 하지

가끔은 눈이 내린다는 소식이

맑은 허공을 찢을 때가 있다

창문을 열면 울음의 입자들이

함박눈처럼 내린다

소리를 낸다는 건

절벽으로 몰려간 이들의 입에서

푸른 담장이가 음표처럼 자라는 일

각기 다른 계절로 자라는 울음은

헤성처럼 떨어지는 비명을

조용히 덮어주고 있다

울음은 상처를 주지 않고도

존재를 바꿔놓는 아름답고도 진지한 시술이다

 

 


 

 

김원경 시인 / 조깅

 

 

밤 사이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연약한 내 척추를 위하여

이른 새벽부터 나는 달린다

쓰레기더미 옆으로 가로등은 졸고 있고

노인은 홀로 긴 골목길을

빗자루 하나로 가르며 어둠을 쓸어내고 있다

밤의 장막 속에 갇혀 있던 하루를 걷어내는 저 노인

쓸면 내어지는 길 위에서 아직도 기다릴 것이 남아 있는가

찢어진 쓰레기더미의 아물지 않는 상처들이

골목 안에 가득하다

가진 것이라곤 오래된 척추 하나,

아침이 오도록 짊어지고 가는

맨살의 고단함이 전부인 저 노인

그 옆으로 달리는 동안

내 관절들은 유난히도 삐걱거렸다

먼 곳에서부터 내려앉기 시작한 그의 피로는

돼지 국밥에 소주 한 잔으로나

청량리 사우나에서 풀어낼 만한 것이 아니다

한때 택시를 몰다가 사람을 박아 보기도 했다는

습관적인 그의 레퍼토리처럼

그는 가장 바깥에서부터 먼 길을 돌아온 것이다

허름한 해장국집에서 올라오는 술기운 같은

넑두리는 허공으로 퍼지는 입김

유리창에 추상화 한 점으로 걸려 있다

웅크리고 앚아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는 주술의 시간

사람들은 끊임없이 국밥을 말며 기도한다

그들은 얼마나 씁쓸하게 인생을 삼키고 있는가, 그러나

자꾸만 휘청거리는 내 척추로는

어떠한 삶의 무게도 감당할 수 없어

어둠이 몰려와 몸을 가두어 버리는 긴 골목길을

이른 새벽부터 달리고 있는 것이다

빼곡히 들어차 숨막히는 불안을 위해

비명을 지르면 부서져 내릴 것 같은 내 척추를 위해

일제히 돋아나는 어둠의 비늘들을 털어내며

척추를 가진 나무들을 뒤따라 이른 새벽,

가장 먼 길을 골라 나는 달리고 있다

 

 


 

 

김원경 시인 / 못

 

 

오늘 아침 거실에 걸려 있던

시계가 쿵하고 떨어졌다

시계에 가려 보이지 않던 못이

앙상한 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우두커니 턱을 괴고 앉아

오랜 세월 녹슬어 빠져버린 못을 생각했다

못은 제 몸의 수십 배,

아니 수백 배도 넘는 무게를 견디고 있었다

제법 맷집이 좋았다

견디는 모든 것은 자신의 울음소리를 잊고

아무도 그 못이 자신의 성대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홀로 남겨진 어린 병사가

엄마 엄마아무리 울부짖어도 들리지 않듯

평생

클라이맥스에서

멋있게 맞는척, 해주는

스턴트맨처럼

 

 


 

김원경 시인

1980년 울산에서 출생. 경희대학 국문과 졸업. 2005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