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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연희 시인 / 식인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6.
한연희 시인 / 식인귀

한연희 시인 / 식인귀

 

모서리에 머물러요

잘 차려진 식탁이지만

이 자리엔 먹을 게 없고

내 몫의 틈을 찾아내 앉아

단 음식 냄새를 맡으면

여기서만큼은

평온하지 않을까요?

오늘 저녁은 누군가에게 묻고 싶어요

한숨도 못 잔 얼굴로 눈을 비비는 동료 하나가

인간이 너무 징글징글한 것 같다고 말하길래

너도 그래 하고 답하고 말았어요

오늘은 그냥 왠지

식탁 위에 놓인 해초 샐러드만

퍼먹었으면 좋겠어요

흔들거리면서 부유하면서

아무것도 따져 묻지 않으면서요

오래전 분명 난 이 순간을 한번 경험해 본 적이 있어요

사는 게 뭣 같다는 선배가 옆에 앉은 후배의 뺨을 후려쳤었나

아니면 이모가 아무 말이나 내뱉던 손님의 주둥아리에 유리잔을 날렸었나

그 장면 다음엔 항상 내가 무심하게 으깬 토마토를 퍼먹었던 것

어쩌면 이건 내가 일기에 써놓은 상상일지도 몰라요

그러나 달큼한 피 냄새가 나요

어떤 한 인간은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남의 손등에 포크를 내리찍을 줄 알잖아요

나는 그래요.

상처 가득한 손등을 바라보며 죽어도 되겠네

피범벅인 손을 빵인 줄 알고 먹으며 맛있다 맛있다 되뇌며

동료의 웃는 얼굴이 부끄러워요

그걸 먹은 내가 부끄러워요

식탐이 솟아나는 게 부끄러워요

죄책감이 어디서 생겨나는 줄 알아요?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저 흰 쌀밥

거기서부터

질기고 비릿한 고기가 아니라

파와 양배추와 당근 버섯 애호박 등등

채식 식탁 앞에서 잠시 울고 말아요

이제껏

나는 쓰레기를 좋아했어요

나는 멈추어있기를 좋아했어요

나는 여리고 약한 것일 뿐이에요

나는 늘 마음을 잘 다스리고 싶었어요

오늘 저녁을 무사히 보내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지옥의 계도 기간이 잘 끝나기를 바라요

식인귀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다물어진다

마음을 도려내 주었지만

한 번도 마음을 채워본 적 없어서

그저 육식에 몰두하고 마는

방금 막 지옥의 입구에 도달한 자로선

이 밤이 지나가도록

배는 쉬이 부르지 않아요

커다란 식탁 위에서 내려올 줄 몰라요

 

 


 

 

한연희 시인 / 비누의 탄생

 리지는 실제 인물이다 영화로 만들어진 리지의 이야기는 서글프기만 했다 대신 네모반듯한 비누에게 리지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욕실 안에 놓인 리지는 글리세린과 코코베타인이 주성분이다 특별히 영혼 일 그램을 넣었다 그러자 변화 무쌍한 리지가 탄생했다

 리지는 브리짓이라는 하녀를 좋아했다 브리짓과 리지는 전혀 다른 영혼이었다 리지는 새어머니를 도끼로 내려쳤다 벌거벗은 채 그랬다 빨간 핏방울이 그녀의 목과 가슴을 적셨을 때 진정 한 인간이 되었다 비누는 리지를 닦는다 피의 이력을 지운다 리지의 성분이 비누를 비누답게 만든다

 브리짓은 자신을 더럽힌 주인에게 도끼를 들었다 실패했다 벌거벗은 비누가 대신 죽이자 브리짓은 울기만 했다 리지는 침착하게 현장을 정리했다 도끼를 닦는 비누. 알리바이를 만드는 비누. 죄를 어루만지면 거품을 일으킨다 이것은 죄가 아니다 이것은 죄가 아니다

 잿물과 산비둘기의 피로 이루어진 비누가 있다 글리세린과 코코베타인의 가족인 리지가 있다 그녀에게는 죄책감이 일 그램도 없다 비누는 재판에서 깨끗함을 인정받는다 브리짓을 떠난 리지는 홀로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불을 끄면 욕실에서 가끔 피비린내가 난다 리지를 손에 꾸욱 쥔다

 

-시집 『폭설이었다 그다음은』에서

 

 


 

한연희 시인

1979년 경기도 광명 출생. 2016년《창작과 비평》 신인문학상 등단. 시집 『폭설이었다 그다음은』 『희귀종눈물귀신버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