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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녀 시인 / 유리컵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7.
김지녀 시인 / 유리컵

김지녀 시인 / 유리컵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네가 옷을 벗고 돌아다녀

왼쪽 엉덩이 아래 멍은 가리기 좋은 위치인데

아래로 퍼지면서 희미해져

숨이 막혔던 그때처럼

믿음이 깨졌을 그때처럼

 

네 얼굴에선 물고기가 헤엄쳐 다녀

한 마리 아니고 세 마리

열두 마리.......

비린 물 냄새가 계속 피어난다

쪼그라든 젖꼭지에서

더 아래 습지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얼룩이 남아

닦아도 지워지지 않아

네가 옷을 입지 않고 돌아다녀

우리가 아는 모든 밤에

 

개처럼 짖지 않지만

개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가장 안전한 곳에서 묘연해지고 있어

 

 


 

 

김지녀 시인 / 큰 파란 바람의 저녁

 

 

바람은 쉽게 땅에 발을 내려놓지 못하고 달아난다

강을 지나 일 년 내내 눈 쌓인 계곡을 지나

그러나 간단하게 뭉쳐지는 구름들 사이로

무섭게 직진하고 있는 태양의 기둥을 지나

벽을 뚫고

천년 전에 만났다 헤어진 사람의 눈동자를 핥으며

지구를 만년쯤 돌고 있는 바람이 이마에 와 닿을 때

국경을 넘어온 얼굴처럼 얼어있는 저녁을 바라볼 때

나는 기둥, 이라는 제목의 나무

활엽으로 침엽으로 옮아가는 숲의 그늘

절벽 위에 서 있으면 어느 고원을 떠돌다 사라진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맴돈다

입술 튼 바람은 서로를 끌어당기며 전진하거나 융기하는

대륙의 저 끝에서 잠시 날개를 접고

녹아 내리는 얼음을 밟으며 며칠 밤낮을 걸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함께 울었을 것이다

몇 달이 지나도 눈이나 비가 오는 숲에서

알을 품은 적 있는 둥지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나무 잎사귀가 다 떨어진 저녁

바닥에 누워 영원히 눈감는 자의 호흡은

처음 비행에 나서는 새의 눈빛처럼 새까만 것이어서

수없이 흔들리며 가라앉아 간다

입 벌린 채 마른 강을 건너가듯이

나는 갈증을 느끼며 파랗게 변해 가는 피부 속에

활공하는 바람의 말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 바람이 데리고 온 먼 곳의 먼지들은 낮게 휘돌다 단단해진다

 

- 제1회 세계의문학 당선작

 

 


 

김지녀 시인

1978년 경기도 양평 출생. 성신여대 국문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 2007년 제1회 '세계의문학 신인상' 을 수상하며 등단.  시집 『시소의 감정』 『양들의 사회학』 『방금 기이한 새소리를 들었다』. 제20회 편운문학상 시부문 우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