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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해돈 시인 / 플라타너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7.
최해돈 시인 / 플라타너스

최해돈 시인 / 플라타너스

 

 

플라타너스는 나이가 없다

설령 나이가 있다 하여도 실제 나이가 아닐 것이다

나는 가끔 그의 숨결을 흘림체로 읽는다

그를 볼 때마다 나는 거꾸로 조금씩 젊어져 간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그 준엄한 무게는

플라타너스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는 죽은 듯 정지한 채로 서 있는 것 같지만

그의 손과 발은 미풍에도 달달 떨린다

떨리는 모습이 마치 멸치떼의 외출 같다

플라타너스가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건

괴로움을 잘 견디고 희망을 가슴에 키운다는 뜻일 것이다

그는 한여름의 뜨거움도 잊고 다만 깊어간다

깊어가면서 잎 넓은 그늘을 만든다

사람들은 그늘서 휴식을 취하다가 세상에 나아가

희망과 사랑을 토닥거리다가, 먼 미래를 그려보다가

다시 플라타너스 그늘로 돌아오는 걸 보면 잘 알 수 있다

사람들이 긴 수평선을 걸어간다는 건

무언가 깨닫고자 하는 몸부림일 것이다

어느 늦은 가을날

떨어지는 플라타너스 잎을 보며 사람들은

조금씩 늙어가며 겸손을 배운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낙엽을 밟으면서

지난 삶의 흔적을 모아 성(城)을 쌓기도 한다

생을 다하여 자신을 활활 태우는 플라타너스

플라타너스는 죽지 않는다, 늘 팽팽하다

 

 


 

 

최해돈 시인 / 춥지 않은 밤

 

 

 아직은

 미완성의 발가락들이

 터널을 뚫으며 지나가는 기차의 눈동자처럼

 사람들이 모두 떠난 후, 막 태어나지 않은 고요의 혀처럼

 지웠다가 쓴 글씨 위에 살며시 내려앉는 초겨울의 침묵처럼

 

 촉촉하다

 풋풋하다

 눅눅하다

 

 그러니까, 미완성의 발가락들이 해야 할 건

 모든 이들이 잠을 자는 사이에도

 허공을 갉아먹는 바람의 손톱을 짧게 깎아야 할 것

 조금씩 쌓이는 하루의 무게를 가볍게 날려버릴 것

 꺼져가는 등불을 다시 환하게 할 것

 

 오늘 밤도 말없이 흐르는 것은 있다. 흐르는 것이 흘러가면서 낳을 수 있는 것을 낳는다. 밤은 짧지 않다. 밤은 길지 않다. 평 생이 걸려도 미완성의 발가락들은 잠을 자고 싶다. 발가락들은 슬프다. 발가락들은 아프다

 

 아직은, 어두운 밤

 하얀 밤

 

 미완성의 발가락들, 그들의 밤은 춥지 않을 것이다

 

 


 

최해돈 시인

1968년 충북 충주 출생. 2010년 《문학과의식》 신인상으로 등단. 『현대시학』으로 작품활동. 시집 『밤에 온 편지』 『기다림으로 따스했던 우리는 가고』 『아침 6시 45분』 『일요일의 문장들』 『붉은 벽돌』. 황금찬문학상 수상. 충북문화재단 및 2016년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