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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음 시인 / 아내의 식탁
꽃무늬 식탁보를 깔아 놓고 나물처럼 웃던 아내가 없다 시뻘건 고무장갑 끼고 척척 김장을 해대던 아내가 없다 싱크대 냄비 된장찌개 시어 터진 김치 어디에도 아내가 없다 모락모락 밥솥과 사과를 깎아 내놓던 네모난 접시 신문지는 그대로 쌓여 있고 자전거는 비스듬히 세워 두었고 모든 것은 여전히 있고 여전히 없다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다 꼬불꼬불 파마머리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다 베란다에 오이꽃이 피었다 아내는 저 오이꽃을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세수도 하지 않고 라면만 끓여 먹는다 나는 추리닝만 입고 티브이만 본다 나는 깡소주를 너무 많이 마신다 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지나가지 못했다 식탁은 식탁이고 형광등은 형광등이다 창밖창밖 비가 내린다 이 비는 아내의 것이다 아랫집 김치찌개 냄새 올라온다 아내는 김치찌개를 싫어했다 창밖창밖 아내는 비를 따라 사라졌다
손음 시인 / 지붕 위의 고양이 역
오래된 지붕은 비밀스럽다 회의가 있는 것처럼 검은 정장의 고양이들이 지붕 위로 모여든다 옥상의 화분들 은 따분한 곰팡이 꽃이나 피우고 있다 바람은 지붕과 방으로 통하는 전선의 가는 허리를 회롱하며 논다 빨래 들은 식구들처럼 야위어 있다
언젠가 남자가 싸움 끝에 던진 구두 한 짝이 옥상에 그대로 있 다 구두에는 아직도 남자의 욕이 들어 있다 비밀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지붕을 뚫고 올라온 나뭇가지와 노란 물탱크, 눈알이 빠진 인형, 망가진 의자, 소주병, 비밀을 가진 은신처는 정처가 없다
저녁의 고양이들이 남아 있는 추억을 의논하며 서로 의 통증을 핥아 준다 여자의 고함 소리가 다시 옥상을 혼든다 남자가 또다시 욕을 한다 창문이 부르르 떠는 소리 들린다 옥상까지 올라온 욕이 무겁다 곧 옥상은 무너질 것이다
옥상에 모여든 고양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한쪽 눈이 없는 고양이가 혼자 남아 있다 헐레벌떡 골목을 뛰어가 는 바람이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모자 쓰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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