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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윤 시인 / 즐거운 감옥 그녀는 고층 아파트에 살며 당신이 물뿌리개를 흔들 때마다 환하게 웃는다 웃음이란 그녀의 가치를 유지하는 스킨로션 같은 것 당신은 수시로 증상을 살핀다 여기가 썩었군 꽃잎 몇 장 툭 뚝 떼어 내는 당신은 사실 서툰 의사 가끔 눈두덩에 멍이 들곤 했지만 그녀는 잠자코 웃는다 일용할 양식은 언제나 당신의 손에 있다 며칠 동안 홀로 남겨지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하는 꽃의 권리에 대해서도 그녀는 다른 별에서 온 이방인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견디곤 했다 마침내 링거 한 병을 꽂고 당신의 거룩한 손을 보며 배시시, 옷을 때까지 봄비가 내린다 온종일 유쾌한 상상이 베란다를 뛰어내리고 유리창에 부딪힌 한 잎의 무기력한 웃음이 쓸쓸히 진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온 바람, 초인종을 길게 누르자 오늘도 삼십 촉 필라멘트 웃음을 켜고 그녀. 당신의 눈 속으로 화르르, 뛰어든다 -시집 『수화기 속의 여자』중에서
이명윤 시인 / 능숙한 수리공 남자는 본체를 비스듬히 세운 뒤 드라이버를 든다 답답하던 오후 단추가 빠르게 풀린다 오랫동안 무심했군요 속내가 까맣습니다 가끔 동해바다 갯바람이라도 쐬며 환기를 시켜 주세요 이제 전원을 켜고 당신의 눈 속으로 들어갑니다 머릿속이 오래된 파일들로 가득하군요 추억은 일상을 느리게 만들죠 갑자기 오후가 빗속에 멈추어 선다거나 내릴 곳을 지나친 채 창밖을 본다거나 일주일 간격으로 휴지통을 비우고 중요한 기억들은 압축을 하세요 밤하늘을 보세요 별들은 모두 시간의 압축파일이죠 별 하나를 클릭하면 차르르 수많은 문장이 열리지요 문제는 바이러스 당신은 너무 쉽게 도시의 불빛에 노출되어 있었군요 그래요 오른쪽 눈이 열리지 않았을 거에요 커튼 하나를 달아 드리죠 잠시 외출 시엔 얼굴보호기를 사용하세요 그것은 당신에 대한 예의입니다 AS는 이번이 마지막, 이제부턴 직접 당신의 머릿속을 열어야 해요 그는 얼굴이 구식이라며 친절하게도 요즘 유행하는 얼굴로 바꿔 주고 갔다 아이스크림 같은 봄날 오후 수많은 창이 꽃사람 열리고 머릿속에선 빠른 속도로 새가 날아다녔다
-시집 『수화기 속의 여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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