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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종수 시인 / 적벽가赤壁歌
사과를 깎다 왼쪽 엄지를 베었다
좁은 문 열리자마자 심연의 늪을 벗어난 붉은 개들이 한지에 먹물 배듯 달린다
되돌아가지 못하고 벽이 되는 숙명은 고뇌 없이 쌓기만 해온 잉여의 벌이겠다
땀 흘려 수확한 열매를 거저 얻고도 고맙다는 마음 부족했다
다섯을 받아 둘만 나누고 셋을 혼자 취했으니 욕심이겠고 마지막 하나는 감사보다 먹어치운다는 방종 앞세웠으니 어쩐지 괘씸죄도 성립했겠다
그리하여 이 붉은 흔적은 사과의 구형이요 칼의 형벌이라
왼손 엄지에 생긴 붉은 실금 하나, 적벽赤壁에 새겨진 사과의 표정과 칼의 태도를 슬슬 쓰다듬으며 주문처럼 외운다. 사람이 되어야지, 사람이 되어야지. 사람이 되어야지...
-<시와경계> 2022 가을호
손종수 시인 / 금수저 흙수저
수산시장 핏물 감춘 도마 위에서 펄떡펄떡 맹렬한 삶의 비린내.
살려주세요. 살고 싶어요.
말할 수 있다면 그랬을 거 같아.
아니 생각해 보니 그건 관념의 사치
갈고리에 찍힌 저 몸부림은 그저 아플 뿐 죽음 모른다.
날것의 공포는 먼 소멸이 아니라 가까운 고통으로부터 오는 것.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말했겠지.
아파요, 너무 아파요.
괴로움 멈출 수 있다면 죽어도 좋아 (홍, 죽음이 뭔지도 모르면서).
몸통이 반쯤 잘려나간 방어와 멍게와 조개와 새우와 낙지를 샀어.
얼굴 가득 웃음 분칠하고 손짓하는 더벅머리 따라 들어간 골목식당.
회 뜨고 토막 내고 굽고 끓이는 호러, 익명의 목숨들 덧없이 스러져갈 때 문득 떠오른 영화 대사 한 마디.
그러게 잘 하지 그랬어, 아니면 잘 좀 태어나든가.*
* 영화 <내부자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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