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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영숙 시인 / 달빛 비문碑文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16.
고영숙 시인 / 달빛 비문碑文

고영숙 시인 / 달빛 비문碑文

 

 

그대, 흩어진 갈비뼈들이 잇닿아 있는

거뭇거뭇 돋아나는 눈썹달이었는가

밑줄을 그은 싯푸른 핏줄기들이

슬픔 몸으로 흘러들어 가는가

죽은 밤의 가죽을 벗겨 북을 두들기며

휘모리장단으로 비문의 끝을 건너가는가

저릿저릿 쌓여가는 울음 사이

입 틀어막은 하늘이 비껴가는가

미처 추스르지 못한 뼈마디를 더듬어

달빛은 한 올 한 올 서로를 핥아주었는가

나였는가

그대 가장 아픈 곳이었는가

화르르 제 몸 날리듯

붉은 오월로 흩날리는가

그대가 봄날로 흐르는 동안

나 살았는가

시린 뼈 하나 지키는 일

짧은 목례가 따뜻해서 오래오래 슬펐는가

울컥, 선 채로 떨구어진 꽃잎처럼

나에게도 독 오른 첫사랑이었는가

 

 


 

 

고영숙 시인 / 칼질의 속성

 

 

 이 칼은 가슴 언저리를 그었던 오래된 상처, 거침없이 뽑아든 단칼, 닳아빠진 칼자루를 억지로 믿으며 베이는 것도 모르는 채 무뎌지는 문장의 모서리마다 새김칼을 차고 숫돌에 천만 번 물길을 긋는다 칼같이 자르지 못하고 칼같이 살지도 못한 채 언어의 바다에 나가 파도를 자르지도 못하고 얼어붙은 수심을 읽어 내리지도 못하고 온몸에 검붉은 쇠꽃 핀 채로 한 줄 파도를 썼다 지우는 물살, 한두 줄 자국으로 상처 난 생의 목록들을 끼워 맞추는 생애 단 한 번 쓰는 칼이었을

 

 


 

고영숙 시인

제주 출생. 2017년 [제주작가] 신인상 수상, 2020년 [리토피아]로 등단. 현재 다층 동인, 제주작가회의 회원. 2024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 시집 『나를 낳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