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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경숙 시인 / 오동梧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19.
고경자 시인 / 오동梧桐

고경숙 시인 / 오동梧桐

 

​오동꽃 피었다

 

여아 출산은 여자 탓이라 해산 간도 스스로 해야했던

기쁠 것도 장할 것도 없던 봄,

천지분간을 못하고

연보랏빛 나팔을 불어주던 오동만이

여자 편이었던 그 계절이다

 

여남은 해가 지나면 제구실을 할 거라는 믿음으로

갓난애 팔뚝만 한 여린 가지 하나 꾹 꽂아두고

읍으로 면으로 보따리 이고 다니던 그 계절이다

 

없는 집 허기만큼이나 쑥쑥 오동은 크고

계집애도 크고 혼인 말도 오갔다

베기를 기다린다는 걸 알기라도 하듯

그 집에서 살아있는 것들 중 가장 호기로운 나무 밑에서

바람은 또 얼마나 쉬어 갔는가

 

중신어미 다녀가고 온전치 못한 신랑감에

논 몇 마지기가 덤으로 온다던 그 밤

마당 언저리에 그림자 하나 대롱대롱

오동보다 더 뻣뻣하게 매달렸다

 

부모 앞서 간 야속한 년 오동나무관도 아깝다며

어미는 몇 번이나

불구덩이로 따라 들어가려 했다

 

다시 봄이다

 

외딴 농가 눈언저리가 짓무는 오지의 봄은

더 이상 어린애 울음소리 없고

오동나무 아래 죽 늘어앉은 할매들의 서사가

그저 담담하게 오동을 닮았을 뿐이다.

 

 


 

 

고경숙 시인 / 하마터면

 

 

휘파람 두 번 불면

 

나온다던 순이가 감감 무소식입니다

 

불안한 내 발장난에

 

개가 짖습니다

 

저 놈의 개 미쳤나 혼잣말에

 

예서제서 또 개가 짖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되겠다고

 

동네 어귀를 도망쳐 나오는데

 

이 집 저 집 불을 켭니다

 

또 개들이 짖습니다

 

왕왕 짖습니다

 

온 동네가 엉망진창입니다

 

 


 

고경숙 시인

1961년 서울 출생. 2001년 계간 《시현실》로 등단. 시집 『모텔 캘리포니아』 『달의 뒤편』 『혈穴을 짚다』 『유령이 사랑한 저녁』 『허풍쟁이의 하품』. 수주문학상, 두레문학상, 경기예술인상, 희망대상(문화예술부문), 한국예총 예술문화공로상 수상. 부천예총 부회장, 수주문학상운영위원장, 부천시 문화예술위원, 부천의 책 도서선정위원장, 부천신인문학상운영위원, 부천시립도서관 운영위원, 부천펄벅기념관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