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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옥 시인 / 경비실 아저씨
1302호 페인트칠 하던 페인트공이 남은 페인트로 한 평 남짓 경비실 지붕을 온통 녹색으로 칠해주던 날 경비실 아저씨 앉아 있지 못하고 종일 들락날락 미소 지으며 엉거주춤 뒷짐 진 몸짓으로 올려다보고 또 올려다 본다 사정 모르는 어둠이 거만하게 툭툭치고 들어오자 지붕 위 굴뚝처럼 우뚝 선 가로등 불빛에 또 나와 본다 새끼돼지만한 랜턴을 손에 쥐고 아파트 한 번 돌고 와 올려다보고 한 바퀴 더 돌고 와 올려다보는 경비실 아저씨 고대광실도 부럽지 않은 눈치였다 새벽 네 시가 되어서야 의자 몇 개 나란히 놓고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눈을 감아보는, 때로는 그 옛날 푸르른 고향 언덕을 춘몽 속에 담는, 고개를 밖으로 길게 빼보기도 하는, *************** 간밤 일을 알고 있었는지 다투어 꽃잎 세례를 주는 경비실 옆 도화나무
한창옥 시인 / 지문을 지우는 그녀
그녀는 치과에 가기 싫다고 했다 벌려야 하는 치과와 산부인과 나 또한 살면서 마음 한 번 벌려보지 못한 나날 세상은 앙다문 그녀를 언제 제대로 들여다보기나 했나 사방으로 부딪치고 깨져 껍질이 벗겨져도 마을버스를 타고서야 커다란 눈 껌벅이며 백옥처럼 간직해 온 사지를 흔들림에 감추는 한 마리 사슴인 걸, 바람의 옷깃을 잡고 따라 나서는 산과 들의 까칠한 촉감에서 푸른 정맥의 플러그를 접속시키다가 늘 그렇듯 가슴 언저리에 반쪽씩 남은 진통제를 삼키며 한 줄 한 줄 지워버린 꼬리말의 빈 행간처럼 공허해 하는 길다란 뿔, 헛발 디딜까 거미줄 빌려 망을 쳐놓기도 하며 가끔은 그 줄에 걸려 허우적대는 뿔의 욱신거림 욱신거림이 탁! 터져 벌려지길 바라기도 하지만 스스로 움켜쥐고 엎드린 그녀는 혼자 접었다 폈다 구겨지는 젖가슴 아래 진 빠진 시간의 근육을 수직으로 늘려보다가
마지막 지문을 모두 지우는 눈빛 속에서 아직 벌리지 않는 그녀의 이빨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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