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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혜순 시인 / 당신의 눈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19.
김혜순 시인 / 당신의 눈물

김혜순 시인 / 당신의 눈물

 

 

당신이 나를 스쳐보던 그 시선

그 시선이 멈추었던 그 순간

거기 나 영원히 있고 싶어

물끄러미

꾸러미

당신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 것인

물 한 꾸러미

그 속에서 헤엄치고 싶어

잠들면 내 가슴을 헤적이던

물의 나라

그곳으로 잠겨서 가고 싶어

당신 시선의 줄에 매달려 가는

조그만 어항이고 싶어

 

-『당신의 첫』 문학과지성사

 

 


 

 

김혜순 시인 / 엄마란 무엇인가

 

 

엄마는 나를 두 번 배신했다

첫번째는 세상에 나를 낳아서

두번째는 세상에 나를 두고 가버려서

 

엄마가 죽기 전 나는 이미

배신자의 배신자가 되어 있었다

 

배신자의 기저귀를 갈아드린다

두 팔에 안고 진정제처럼 안아드린다

 

팬티를 치켜올린다

엄마! 왜 이래? 이건 아니야! 소리친다

 

눈물을 닦아드린다

떼쓰지 마! 꾸짖어드린다

 

이제 무게밖에 남지 않은 배신자에게

쓰라린 내 가슴을 한 술 두 술 먹여드린다

 

이제 이 배신자를 키워서 시집도 보내야지 마음먹는다

아빠에게는 두 번 다시 안 보내 단호하게 생각한다

 

마주 앉아 서로에게 뿌리를 내린 채

나뭇가지를 얽었으니 한정 없이 매년 이파리를 쏟았으니

 

(새는 알을 낳을 때 통증을 느낄까?)

(새는 날개를 펄럭일 때 통증을 느낄까?)

 

배신자의 배신자가 되어서 엄마엄마 불러보니

엄마라는 단어에는 돌고 돈다는 뜻이 있다

 

(시계 안에서 째깍째깍 엄마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돈다)

(엄마는 축지접을 쓴다 엄마가 초침처럼 나를 찌른다)

 

그렇게 엄마는 내 앞에 괘종시계처럼 늘 있었다

시간은 나를 늘 엿봤다

 

나를 낳지 말란 말이야

내가 시간의 손깍지를 푼다

 

노을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신음이 새어 나온다

내가 내 따귀를 갈긴다

 

결국 엄마는 나를 두 번 배신했다

첫번째는 세상에 죽음을 낳아서

두번째는 세상에 죽음을 두고 가버려서

 

(왜 신생아는 태어나서 새끼를 빼앗기고 온 어미 새처럼 울까?)

 

이윽고 나도 엄마를 두 번 배신하게 되었다

첫번째는 엄마 조심히 가 하고 죽은 엄마를 낳아서

두번째는 나만 남아서

 

 


 

김혜순 시인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강원대학교 국문학과와 건국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국어국문학 박사.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으로 등단. 1997년 제16회 「김수영문학상」, 2000년 제1회 「현대시작품상」, 2000년 제15회 「소월시문학상」, 2006년 제6회 「미당문학상」, 2008년 제16회 「대산문학상」 수상. 시집  『또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여행기』 『들끓는 사랑』 등. 현재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