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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은교 시인 / 저물녘의 노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18.
강은교 시인 / 저물녘의 노래

강은교 시인 / 저물녘의 노래

 

 

저물녘에 우리는 가장 다정해진다

저물녘에 나뭇잎들은 가장 따뜻해지고

저물녘에 물 위의 집들은 가장 따뜻한 불을 켜기 시작한다

저물녘에 걷고 있는 이들이여

저물녘에 그대의 어머니가 그대를 기다리리라

저물녘에 그대는 가장 따뜻한 편지 한 장을 들고

저물녘에 그대는 그 편지를 물의 우체국에서 부치리라

저물녘에 그림자도 접고

가장 따뜻한 물의 이불을 펴리라

모든 밤을 끌고

어머니 곁에서.

 

 


 

 

강은교 시인 / 어떤 비닐 봉지에게

 

 

어느 가을날 오후, 비닐 봉지 하나가 길에 떨어져 있다가 나에게로 굴러왔다.

그 녀석은 헐떡헐떡거리면서 나에게 자기의 몸매를 보여주었다.

그 녀석이 한 바퀴 빙 돌았다, 마치 아름다운 패션 모델처럼

그러자 그 녀석의 몸에선 바람이 일었다.

얄궂은 바람, 나를 한대 세게 쳤다.

나는 나가 떨어졌다. 한참 널브러져 있다가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 녀석, 비닐 봉지는 바람에 춤추며 가는 중이었다.

나는 마구 달려갔다, 바람 속으로

비닐 봉지는 나를 돌아보면서도 자꾸 달아났다. 나는 그 녀석을 따라갔다,

넘어지면서, 피 흘리면서

쓰레기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으로,

실개천이 쭈빗쭈빗 흐르고,

흐늘흐늘 산소가 없어지고 있는 곳으로,

우리의 꿈이 너덜너덜 옷소매를 흔들고 있는 곳으로,

비닐 봉지는 나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나는 위대해! 나는 영원해!

나는 몸을 떨었다, 귓속으로 그 녀석의 목소리가 쳐들어왔다.

─ 나는 영원히 썩지 않는다네, 썩지 않는 인간의 자식이라네.

비닐 봉지는 바람 속에 노오란 꽃처럼 피어났다.

 

-시집 <어느 별에서의 하루> 중에서

 

 


 

강은교 시인

1945년 함경남도 홍원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바람 노래』,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등. 산문집 『허무수첩』, 『추억제』, 『그물사이로』 등. 동화 『숲의 시인 하늘이』, 『하늘이와 거위』 등.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 1992년 제37회 현대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박두진문학상〉 〈구상문학상〉등 수상. 현재 동아대 명예교수.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