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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남희 시인 / 나팔꽃의 경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18.
박남희 시인 / 나팔꽃의 경계

박남희 시인 / 나팔꽃의 경계

 

 

나팔꽃이

오래된 담장을 타고 기어올라간다

흘끗, 태양을 쳐다보다가

말을 아끼고

꽃봉오리 하나를 새로 피웠다

 

흙과 담장 사이, 담장과 하늘 사이

나팔꽃은 문득

나팔을 불어대고 싶은 마음, 꾹 누르고

꽃을 하나씩 피운다

 

새가 흔들고 간 쥐똥나무 아래

거미가 새롭게 경계를 세운다

 

끝없이 흔들리고 싶은

나팔꽃의 경계는 어디인가

 

바람이 나팔꽃을 흔드는 것은

너무 오랜 습관 같아 불안하고

새가 나팔꽃을 흔드는 것은 돌연,

나팔꽃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것 같아

불안하다

 

새와 바람 사이,

바람과 쥐똥나무 사이에서

나팔꽃은 문득,

말을 아낀다

 

 


 

 

박남희 시인 / 둘레를 지우는 일

 

 

반짝인다는 것은 둘레를 지우는 일일까

 

눈물은 글썽여 제 둘레를 지우고

바람은 반짝이는 것들의 몸 속 빛을 풀어

그 둘레를 지운다

 

너를 처음 본 순간,

세상의 둘레가 온통 허물어져

모든 것이 캄캄하게 보이던 그 날,

 

내 눈의 둘레는 한없이 허물어져

너는 한 떨기 백합이었다가, 돌연

제 속살에 마음번지는 능소화였다가

그 자리에 덩그러니 한 채

글썽이는 속 깊은 우물을 남겨놓았다

 

글썽이는 우물과

그 속에서 깊어지는 별 사이의 거리가

내가 너를 바라보던 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

 

사랑은 종종 완강한 꽃의 둘레를 헐어

새벽하늘 개밥바라기별보다 더 크게 글썽이는

우물 한 채를 보여준다

 

 


 

박남희 시인

1956년 경기 고양시 출생. 숭실대 국문과. 고려대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폐차장 근처』 『이불 속의 쥐』 『고장 난 아침』 『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 『어쩌다 시간 여행』. 평론집 『존재와 거울의 시학』. 현재 『시산맥』주간, 『창작 21』편집위원. 고려대, 숭실대 출강. 현재 시전문지《아토포스》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