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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두자 시인 / 그래피티
자, 우리 시작할까요?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 펼쳐놓은 것은 모두 멈춰 있는 골목입니다 지워지는 것이 많은 벽에서 우리를 들춰보기 시작합니다
깨진 보도블록 위 부서진 평면을 다시 맞춰가며 해쓱한 벽에 깊이 박혀 있는 만만찮은 마음을 꺼냅니다 담벼락에 검은 고양이의 새하얀 울음을 새기면서 간단히 빵을 먹어요
서두르다 컵 안의 우유가 쏟아질 뻔했죠 이 벽이 맞아? 맞을까? 아냐, 아냐 각각의 벽에 눈높이 인사도 해봅니다 마르지 않는 붓과 물감처럼 생각나는 것과 생각 드는 것으로 완성되어가는 벽 햇볕은 아직 따사로운데요
벽 뒤에서 우리가 구겨질 수 있어 더 빨리 색칠을 해야 해요 등을 맞대고 상상하다 내버려두어야 할 곳이 점점 많아지면 탕진하는 늦봄의 라일락 향기처럼 스프레이를 뿌리듯 발 빠르게 움직여요
이 벽에서 저 벽으로 옮겨 가는 동안 내 손에서 비둘기 몇 마리 골목으로 날아올라 감쪽같아 보이는 세상도 탄생해요
이제는 꽉 채운 벽화에서 한 발짝 떨어지기 위해 자전거 열쇠를 풀고 동네를 한바퀴 돌아 보려구요 뒤로뒤로 물러나며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5년 12월호 발표
하두자 시인 / 폭설에 대한 감상
폭설이었다 앞집 소나무가 부러져 베란다를 치고 내게로 쳐들어왔다 앰블란스에 실려가던 아버지 같았다 아버지의 어깨도 소나무처럼 우리 여섯 형제가 무거웠을까 앰블란스에 누운 아버지의 손이 호흡처럼 거칠었다
암 병동 일인용 병실 침대 밑 잘 닦은 아버지의 구두에서 분필 가루 냄새가 났다 초록 칠판과 교무일지가 이름과 직책을 버리고 병실에 누워있다
유리 파편을 치우며 유리처럼 쏟아진 아버지의 마음을 읽는다 병실의 오후 또 폭설이다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정원을 바라보면 어디선가 투명한 링게처럼 눈 녹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깨진 유리창 너머 소나무 속의 빈 교실을 들여다 본다 아버지의 저녁기도도 저리 캄캄했을까 깨지고 긁힌 말들로 가득했던 알콜 냄새나던 아버지의 병상일기 미처 태우지 못했다
사람들이 소나무 행방을 물을 때 사진 속의 아버지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부러진 것은 나였다 -계간 『현대시학』 2025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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