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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시인 / 고비의 당신 당신 꿈을 꾸었어요 지상에서 유일하게 야생 낙타와 야생 당나귀가 사는 곳 모래바람 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길을 잃지 않는, 보이는 것으로 지도를 삼지 않는 사람들 샘에 이르자 양과 말과 낙타가 먼저 물을 먹도록 뒷전에서 기다리며 조용히 웃는 당신의 눈빛, 가축으로 길들였으나 가축만은 아닌 서로 보살피는 쪽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품위를 당신은 가계로부터 물려받았더군요 아름다웠습니다 함께 비를 맞던 순간을 오래 기억할게요 순식간 훑고 지나갈 뿐이지만 한 방울 한 방울 들꽃이 되는 비 물 귀한 곳에서 극진으로 생생해지는 물의 환희가 피톨처럼 온몸으로 전해졌지요 때로 당신 꿈을 꾸고 기도합니다 메마른 도시 너무도 메마른 날에 고비의 당신이 오래도록 안녕하기를 당신의 안녕으로 어떤 아름다움이 지상에서 끝내 지켜지기를 양과 말과 낙타와 가만가만 멀리 닿는 구음과 야생 낙타와 야생 당나귀와 함께
-웹진 『문장』 2025년 1월호 발표
김선우 시인 / 아나고의 하품
언젠가 횟집에서 아나고 한 마리 회 뜨는 걸 보았을 땐 머리 쳐내고 껍질 벗겨내면 그제사 퍼득퍼득, 몸통 전체로 희디흰 슬픔의 가시 같은 게 되어 자꾸 머리를 찔러대는 걸 보았을 땐 머리는 점잖게 거의는 고독하게 한번 크게 입 벌려 생애 마지막 하품을 하고는 영영 입 다물어버리는 것이었는데 한 생명이 몹시도 고적해졌구나, 나는 조금 슬펐더랬다
소록도를 지척에 둔 녹동 앞바다, 경매로 낙찰된 한 바구니의 아나고가 껍질 벗겨져 마흔 개의 머리 차례차례 입 따악 벌려 생애 마지막 호흡 천천히 행하는 걸 보았을 땐 웬일인지 슬픔이니 고독이니 끼여들 자리도 이미 없고 이상스레 차분한 적멸, 같은 것이 내 마음에 공空으로만 번지는 것이었다
원래 그들이 그러하였듯 돌아가야 할 무슨 연유라도 뜬금없이 생겼나보구나 이렇게만 생각이 들고 아낙의 무심한 칼질과 아나고의 길고 조용한 하품을 그저 지켜 보는 것이었는데 비릿하고 들척지근한 냄새가 좀 흘렀지만 모든 과정은 이를 데 없이 평화로웠다
눈을 들면 지척에 흰 사슴과 문둥이의 섬이 보이고 내 머리에 선 감청빛 뿔이 조금씩 돋아나 꼭 그만큼 손마디가 문드러지는 것이었다
-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피어라 석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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