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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인 / 오늘 같은 날 -편지 7
솔바람이 되고 싶은 날이 있지요 무한천공 허공에 홀로 떠서 허공의 빛깔로 비산비야 떠돌다가 협곡의 바위틈에 잠들기도 하고 들국 위의 햇살에 섞이기도 하고 낙락장송 그늘에서 휘파람을 불다가 시골 학교 운동회날, 만국기 흔드는 선들바람이거나 원귀들 호리는 거문고 가락이 되어 시월 향제 들판에 흘렀으면 하지요
장작불이 되고 싶은 날이 있지요 아득한 길목의 실개천이 되었다가 눈부신 슬픔의 강물이 되었다가 저승 같은 추위가 온 땅에 넘치는 날 얼음장 밑으로 흘러들어가 어둡고 외로운 당신 가슴에 한 삼백 년 꺼지잖을 불꽃으로 피었다가 사랑의 '사리'로 죽었으면 하지요
-시집 <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사, 1987)
고정희 시인 / 사랑의 광야에 내리는 눈
아아 그윽해라 눈이 내리네 님 그리운 날 눈이 내리네 평화롭게 겨울 하루 내리는 눈은 어둠의 들녘 저편 우리들 부끄러운 기억을 덮고 우리들 고통스런 상처를 덮어 백리에 뻗은 백두 벌판 사랑의 광야에 이르네
아아 부드러워라 눈이 내리네 님 보고 싶은 날 눈이 내리네 포근하게 겨울 하루 내리는 눈은 사랑의 광야 저편 우리가 가야할 언덕을 덮고 우리가 건너야 할 강을 덮어 천리에 굽이치는 백두 난봉, 사랑의 숲을 만드네
아아 이뻐라 눈이 내리네 님 만나러 가는날 눈이 내리네 속삭이듯 겨울 하루 내리는 눈은 기다림의 광야 저편 살아있는 날의 가벼움으로 죽어있는 날의 즐거움으로 마음을 비운 날의 무심함으로 우리를 지나온 생애를 덮어
만리에 울연한 백두 영혼, 사랑의 모닥불로 타오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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