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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용 시인 / 물의 문신
물에도 숨결이 있다. 눈빛이 있다. 물의 주름이 아니라,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동그란 파문 같은 것이 아니라, 수면에 드리워진 나무의 그림자, 구름들,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간 누군가의 얼굴이다.
그것들은 물에 젖으면 녹아 없어지는 소금처럼 물의 흐름 속에 지워지지만, 수면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의 기억으로 마치 아픈 문신이듯, 물의 내면에 새겨져 있다
물의 숨결을 닮은, 눈빛을 닮은,
그 한 잎의 기억은―.
-계간 『창작21』 2024년 가을호 발표
김신용 시인 / 도장골 시편-투명한 벽2
백지를 펴놓고 한 사흘을 끙끙대다가 첫 싯귀를 적을 때처럼 눈이 덮인 마당을 고라니 한 마리가 걸어 들어와 멀리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거실의 유리창 앞에 멈춰선다 머리를 물음표처럼 들고 갸우뚱 실내를 들여다본다 까만 머루알처럼 생긴 눈에는 실내의 풍경이 새겨지듯 떠오른다 안쪽 구석에 놓인 조그만 뒤주 하나, 그 위의 빈 꽃병 하나 벽에 걸린 <책을 읽는 밤>이라는 제목의 그림, 숨은 내 얼굴 만약 고라니가 시를 쓴다면 이런 실내의 풍경일까? 이 풍경에 이물질처럼 떠 있는 한 인간의 서사일까? 그러나 유리창은 고라니의 눈 속에 담긴 풍경을 차단한 채 그곳에 있지만 없는 것처럼 투명하게 놓여 있다 나는 그 유리의 벽을 통해 고라니의 눈을 숨죽인 채 바라본다 밤사이 하얗게 눈이 내린 마당이 백지처럼 놓여 있을 때 첫 싯귀를 적듯 가만히 발자국을 옮겨놓고 싶을 때처럼 그 발자국 하나가 처음 가는 길인 듯, 처음 보는 길은 듯 그렇게 고라니의 눈 속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고 싶을 때 내 눈 속에 담긴 제 얼굴을 보았는지, 고라니는 놀란 듯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온 길을 되돌아 나가버린다 백지 위에는 고라니가 떨어트려놓은 발자국만 남는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빈 발자국뿐이지만 그 발자국을 딛고서도, 그 발자국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내 발자국만 이방인처럼 서 있다 기대는 곳에 벽에 생긴다 그게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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