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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수국 시인 / 고양이와 거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17.
이수국 시인 / 고양이와 거울

이수국 시인 / 고양이와 거울

 

 

거울이 고양이를 읽는 방법을 알려줄까

 

거울은 찬란과 착각 중간쯤의 온도를 좋아해

 

거울 앞에 서기까지 고양이는 고양이를 모르고

우리는 우리를 모르잖아

 

고양이는 고양이만의 길을 내지, 창틀을 지나

나 아닌 나를 찾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어

 

거울 속엔

어두워질수록 환한 길이 있고

꿈속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있지

 

고양이는 늘 거울 뒤에 있으니까

 

미끄러운 얼굴을 만지면

암흑 속으로 눈코입이 빠져버려

그 순간 너의 환상은 부서지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조금 더 멀리 바라봐

숭숭 구멍이 뚫린 미래가 보일지 몰라

 

고양이 울음이 새어 들어오는 바깥을 닫아도

거울 안쪽엔 고양이들이 너무 많아

 

새로운 사물을 만나면 품었던 얼굴은 모두 배경 밖으로

밀어버리는 거울의 습성 때문이야

 

거울은 기어이 찰나를 버렸어

 

삶이 슬픔을 풀어놓으면 시간은 금방 순해지잖아

 

평생 제 등 한번 핥지 못하는 고양이

 

그래서 넌

눈을 감아도 선뜻 어두워지지 못하고

거울은 끝내 너에게 제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거야

 

거울을 향해 네가 야옹하고 울어도 거울은 깨지지 않아

 

-계간 『아토포스』 2025 여름호 발표

 

 


 

 

이수국 시인 / 노릇노릇 구워낸 시간

 

 

벌써 봄이라며 넌,

윗단추를 풀었지 묶은 머릿밑으로

희고 매끈한 목선이 칼라 위 분홍 프릴과 잘 어울렸어

 

거름망에 원두 가루를 넣고

주둥이가 기다란 홍학 닮은 주전자에 물을

천천히 원을 그리며 부었지

 

부풀다 가라앉고 부풀다 가라앉고

 

조용한 숨소리가 예가체프 향을 따라 바닥으로 스며들었어

 

중요한 이야기는 다 밀어버리고

우리끼리 남아 우리끼리 숨는 거야,너는 말했지

 

주어가 없어도 우리는 통하니까

지금은 무겁지 않게

구두를 벗고 맨발로 페이지를 넘겨보는 거야

 

오슬로의 나무 그림자를 접어보는 거지

햇살을 오려 네 눈동자에 붙여보는 거야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갈라파고스 코끼리 거북이 짝짓기는 언제 하는지

라임 오렌지 나무 꽃은 언제 지는지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끼득 끼득 끼득

 

원두 콩 안에서 원두 콩 밖으로 튀어보는 거야

 

삼백예순다섯날 중

오늘 하루는 커튼을 내리고

격자무늬가 있는 장식장 인형들을 바꿔보는 거지

자리를 옮겨가며 어두워지는 햇살처럼

 

끝까지 가보는 거야

하얗게 망쳐보는 거야

 

-『모던포엠』 2022. 4월호

 

 


 

이수국 시인

한국방송통신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과 졸업. 2020년 《서정시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