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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묵 시인 / 흔적
가령, 그건 줄 수 있을지 모를 선물을 양손 가득 들고 만원 버스를 탔는데 좀처럼 오지 않던 너의 전화가 걸려 오면 바보같이 허둥대다가 옆 사람 얼굴을 때리고 또 옆 사람의 팔을, 허리를 때리면서 손발이 부족한 내가 다족류로 변하는 거였지 여덟 번째 다리로 네 전화를 받고 여덟 개의 다리로 네게 기어가는 거였지
애인이 없다는 내게 누군가 다가와 갈비뼈를 끌어안았다
이 다리들은 뭐예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임원묵 시인 / 겨울잠
한파 예보를 들었습니다 수돗물을 약하게 틀어 두기로 합니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낮에도 당신이 떠오릅니다 어젯밤 기꺼이 잠드는 방식으로 보냈던 당신입니다 형광등을 끄는 것으로 불 꺼진 방인 척 속였던 어제입니다 낮에는 아무것도 속일 수 없어서 나는 이불로 온몸을 여미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미세하게 흐르는 수돗물 소리가 들렸고 오래된 가구의 나사못이 하나씩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살아본 적 없는 팔십년대 서울 분위기와 말투를 느낄 수 있는 옛날 영화가 좋다던 당신 같이 난로를 쬐다가 문득 붉은 벽돌집이 보고 싶다던 당신 아무것도 믿지 않았지만 눈 내리는 풍경은 선명했던 그날 데운 술을 나눠 마시며 나를 당신의 검은 새라 불렀던 당신 무엇도 보이지 않을 만큼 검어진 새를 나는 사랑이라 부르다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아 외로웠습니다 망가진 가구들이 방안으로 쏟아졌고 책상과 의자가 조각났고 나는 버려진 목재에 기대 바다를 건너는 기분으로 창밖을 보았습니다 해가 떠 있었고 당신은 여전히 떠올랐고 침엽수의 잎마다 눈이 쌓여 있는
하얀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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