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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차애 시인 / 잠복潛伏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17.
안차애 시인 / 잠복潛伏

안차애 시인 / 잠복潛伏

 

 

숨소리를 듣는 것은 위험하다

숨소리 속에서 잠복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상처와 더러운 기억들을 두통약처럼 달고 사는 이들의

들숨과 한숨 사이에는 치명致命이 산다

 

영화 속의 남자 형사들은

위험한 여자들의 숨소리와 웃음소리를 훔치다가 겹겹 숨의 동그라미에 갇혔다

 

잘 웃고

강아지처럼 둥근 눈초리를 가진 용의자들의 숨소리는

특히 위험하다

 

마술사의 스카프와 흰 손 사이에서

새가 날고 장미가 피고 기침 소리가 나는 사탕이 튀어나오듯,

 

번진 숨소리에서

금 간 심장이 굴러다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깨진 물의 흐느낌 소리를 만질 수도 있다

 

상처로 상처를 태우는 숨은 불완전 연소라서

중독성 기체의 농도가 높은 것일까

더러운 기억 위에 쌓이는 더러운 기억은, 끈끈이주걱처럼

감염의 통로를 찐득찐득 열어 놓는 것일까

 

숨소리를 훔친 자들은 잠복기를 거친 바이러스처럼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병을 통과한다

 

온몸이 하나의 신경다발인 듯, 뚝뚝 끊어지거나

툭툭 나가떨어지는 하드보일드한 질병이다

 

 


 

 

안차애 시인 / 향유고래를 열면 바람이 분다

 

 

잠기거나 잠근 아이는 자라서 변호사가 됩니다

당연히 픽션입니다

픽션은 픽션으로 풀 때 그럴싸한 개연성을 가지는 법이라서

고래가 아이들 열 때마다, 화면 가득 스펙트럼이 출렁입니다

 

향유고래는 최고 75톤쯤의 부력을 만들고

사각의 머릿속에는 밀랍처럼 차곡차곡 등고선이 접혀있지요

고래의 이마는 표정이 없어서

반향어*를 걸어두기에 적당한 낭떠러지를 가졌고요

 

고래는 사각의 몸을 세워 수직의 잠을 자고

걸어 잠근 사각을 열어줄 풍속이 필요하지요

속도가 열쇠인 방도 있습니다

흰이마가 출구인 몸도 있습니다

 

고래가 물 위로 튀어 오르고,

아이가 이마를 흔드는 것은 동시다발입니다

부력이 수면을 찢는 것과 생각이 등고선을 빠져나오는 것이

한동작인 것처럼요

 

열거나 열린다는 것은

향유, 향유

공통의 바람이

서로의 몸을 통과하는 일입니다

 

스펙과 스펙트럼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틈새의 관계를 엮어가듯 말이지요

 

*반향어反響語: 다른 사람의 언어를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는 중상

 

-계간 《시와 반시》 2023년 봄

 

 


 

안차애 시인

1960년 부산에서 출생. 부산교육대학.대학원 국어교육 전공. 200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불꽃나무 한 그루』 『치명적 그늘』 『초록을 엄마라고 부를 때』. 교육 도서 『시인 되는 11가지 놀이』 등. 2014년 세종우수도서 선정. 문예진흥기금, 문화재단기금 다수 수혜. 한국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