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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세영 시인 / 겨울의 끝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17.
오세영 시인 / 겨울의 끝

오세영 시인 / 겨울의 끝

 

 

​매운 고춧가루와 쓰린 소금과 달콤한

생강즙에 버물려

김장독에 갈무리된

순하디 순한 한국의 토종 배추

양념도 양념이지만

적당히 묵혀야 제 맛이 든다.

맵지만도 않고 짜지만도 않고

쓰고 매운 맛을, 달고 신 맛을

한가지로 어우르는 그 진 맛

이제 한 60년 되었으니

제 맛이 들었을까,

사계절이라 하지만 세상이란 본디

언제나 추운 겨울

인생은 땅에 묻힌 김칫독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인가

그 분이 독을 여는 그 때를 위해

잘 익어 있어야 할 그 김치.

 

-시집 『적멸의 불빛』 문학사상사, 2001.

 

 


 

 

오세영 시인 / 갈필渴筆의 서書

 

 

오늘도

분주하게, 한가롭게 혹은 다급하게

뒤뚱뒤뚱, 성큼성큼 두 발로 걷는 걸음,

사람들은 그것을 발자국이라 하더라만

실은 한 글자, 한 글자씩 또박또박

삐뚤삐뚤 맨땅에 써 내려간 문장들의

어휘들일지도 모른다

O자 다리, X자 다리, 필八자 다리, 11자 다리,

아니 ㅅ자 다리라 하지 않더냐

인생이란 백지 위를 걷는 만년필,

타고날 때 가득 채운 그 푸른 잉크가

다 할 때까지

행을 좇아 한 글자 한 글자 발걸음을 뗀다.

가도 가도 아스라한 지평선,

그 지평선을 넘는 날은 마침내

올 것인가.

절뚝절뚝 혹은 저벅저벅 ......

원고지에

한 편의 소설을 쓴다.

 

-시집 <갈필의 서'에서> 에서

 

 


 

오세영 시인

1942년 전남 영광(靈光)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1968년 同 대학 대학원서 석사학위및 문학박사학위. 196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시간의 뗏목』 『봄은 전쟁처럼』 『문열어라 하늘아』 『바람의 그림자』 등. 시선집 『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 등. 한국시학회장,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역임. 녹원문학상 평론부문,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공초문학상, 만해상 문학부문 대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