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세영 시인 / 겨울의 끝
매운 고춧가루와 쓰린 소금과 달콤한 생강즙에 버물려 김장독에 갈무리된 순하디 순한 한국의 토종 배추 양념도 양념이지만 적당히 묵혀야 제 맛이 든다. 맵지만도 않고 짜지만도 않고 쓰고 매운 맛을, 달고 신 맛을 한가지로 어우르는 그 진 맛 이제 한 60년 되었으니 제 맛이 들었을까, 사계절이라 하지만 세상이란 본디 언제나 추운 겨울 인생은 땅에 묻힌 김칫독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인가 그 분이 독을 여는 그 때를 위해 잘 익어 있어야 할 그 김치.
-시집 『적멸의 불빛』 문학사상사, 2001.
오세영 시인 / 갈필渴筆의 서書
오늘도 분주하게, 한가롭게 혹은 다급하게 뒤뚱뒤뚱, 성큼성큼 두 발로 걷는 걸음, 사람들은 그것을 발자국이라 하더라만 실은 한 글자, 한 글자씩 또박또박 삐뚤삐뚤 맨땅에 써 내려간 문장들의 어휘들일지도 모른다 O자 다리, X자 다리, 필八자 다리, 11자 다리, 아니 ㅅ자 다리라 하지 않더냐 인생이란 백지 위를 걷는 만년필, 타고날 때 가득 채운 그 푸른 잉크가 다 할 때까지 행을 좇아 한 글자 한 글자 발걸음을 뗀다. 가도 가도 아스라한 지평선, 그 지평선을 넘는 날은 마침내 올 것인가. 절뚝절뚝 혹은 저벅저벅 ...... 원고지에 한 편의 소설을 쓴다.
-시집 <갈필의 서'에서> 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영춘 시인 / 돌무덤 외 1편 (0) | 2026.02.17 |
|---|---|
| 안차애 시인 / 잠복潛伏 외 1편 (0) | 2026.02.17 |
| 황금찬 시인 / 접동새 외 1편 (0) | 2026.02.17 |
| 황정현 시인 / 모아이 외 1편 (0) | 2026.02.16 |
| 설하한 시인 / 물고기의 잠 외 1편 (0) | 2026.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