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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곽재구 시인 / 나와 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18.
곽재구 시인 / 나와 나

곽재구 시인 / 나와 나

 

 

평생 떠돌이로 살고 싶었죠

국경이나 설산 대인지뢰와 같은 단어들이 좋았죠

매일 밤 같은 꿈을 꾸었죠

보라색 밤하늘 아래 설산이 있고

설산 그림자 담긴 호수 위로 두 반딧불이 날아가요

사랑이나 꿈 시 같은 단어들은 커피 한 잔보다 시시해요

언젠가 당신이 내게 왜 같은 꿈을 꾸는가 물었죠

그 일보다 사랑스런 일이 없으니까, 라고 대답했죠

당신은 매일 밤 다른 꿈을 꾼다고 말했죠

손풍금 라벤더 향기 서커스 수수부꾸미 국경 같은 단어들을 좋아한다고 했죠

우리가 함께 국경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줄 처음 알았죠

어느 날은 당신이 내 안에서 방금 쓴 시를 읽기도 하고

어느 날은 내 안에서 당신이 손풍금을 연주하기도 했죠

우린 둘이며 하나이고 하나이며 둘이에요

우리 안에 만지면 사라지는 국경이 있는 셈이죠

이 국경이 있는 한 우리는 영원해요

당신을 많이 미워하고 그보다 많이 사랑했지요

보라색 밤하늘 아래 두 반딧불이 날아가요

호수의 설산 그림자가 살며시 포개져 하나가 돼요

 

 


 

 

곽재구 시인 / 대못이 박힌 자리

 

 

사내가 망치로

대못을 박았다

 

못은 제 온몸을

나무 깊숙이 투입하였으므로

나무와 못은

서로 행복하였다

 

세월이 흘러

못은 붉게 물들어

바스러지고

나무의 등에

빈 구멍 하나가 남았다

 

늙은 사내가

빈 구멍에 망치로

새못을 박았다

 

나무는 제 몸 안에 남은

붉은 녹 몇개를 떨구고는

고요히

구멍과 함께 부서졌다

 

-시집 <꽃으로 엮은 방패>에서

 

 


 

곽재구(郭在九) 시인

1954년 전남 광주 출생. 전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숭실대학교 대학원. 1981년 중앙 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사평역에서' '서울 세노야'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등.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 1996 제9회 '동서문학상'. 1986 계간지 '시와 사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