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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류인서 시인 / 여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19.
류인서 시인 / 여우

류인서 시인 / 여우

 

 

재 하나 넘을 적마다 꼬리 하나씩 새로 돋던 때

나는 꼬리를 팔아 낮과 밤을 사고 싶었다

꼬리에 해와 달을 매달아 지치도록 끌고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꽃을 샀다

새를 샀다

 

수수께끼 같은 스무 고개 중턱에 닿아

더이상 내게 팔아먹을 꼬리가 남아 있지 않았을 때

나는 돋지 않는 마지막 꼬리를 흥정해

치마와 신발을 샀다

피 묻은 꼬리 끝을 치마 아래 감췄다

 

시장통 난전판에 핀 내 아홉 꼬리 어지러운 춤사위나 보라지

꼬리 끝에서 절걱대는 얼음별 얼음달이나 보라지

 

나를 훔쳐 나를 사는

꼬리는 어느새 잡히지 않는 나의 도둑

당신에게 잘라준 내 예쁜 꼬리 하나는

그녀 가방의 열쇠고리 장식으로 매달려 있다

 

 


 

 

류인서 시인 / 처녀들의 램프

 

 

빛들은 홀연히 램프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사라진 모든 것들이 그 이상한 동쪽 끝방에 갇혀 있으리라 믿는 처녀들

끝없이 램프의 캄캄한 구멍 속을 훔쳐본다

얼룩수염을 가진 램프의 거인은

처녀들의 엷은 분홍 눈꺼풀을 덮고 잠들어 있다

동쪽 맨 끝방을 여는 오래된 열쇠는 거인의 헝클어진 수염 끝에 단단히 묶여 있다

 

(......)

 

어느 아침

램프는 울컥, 삼켰던 모든 것들을 제 그늘 안에 쏟아놓는다

거인은 사라지고 동강난 열쇠와 녹슨 정조대, 부러진 새들의 발목

호호백발 백년 전의 처녀들만 햇빛 아래 소복하다

 

 


 

류인서 시인

1960년 경북 영천 출생. 2001년 계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여우』 『신호대기』 『놀이터』. 2009년 제6회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2010년 제11회 청마문학상 신인상, 2013년 대구시인협회상, 2015년 지리산문학상, 2019년 김춘수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