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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잠 시인 / 접사(接寫)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22.
이잠 시인 / 접사(接寫)

이잠 시인 / 접사(接寫)

 

 

옛집이 무너져 내릴 때 안방에 살던 거미는 어찌 되었을까

밥을 먹다가도 자려고 누웠다가도 불쑥 생각난다

바다도 먼데 희한하게 게를 닮았던 거미

사방 무늬 천장에서 대대로 새끼 치며 살았을 털 난 짐승

다시 못 볼 사람처럼 나는 자꾸 그놈만 찍어 댔지

다시 못 볼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는데

숱한 기억들이 은거하던 마당의 넓적돌 밑 쥐며느리 굴

닳고 닳은 마룻장에서 쭈뼛거리던 녹슨 못들

벽지 안에서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던 한숨들

침묵 속에서 깜빡이던 별빛들

가장 추운 날 저녁의 경쾌한 숟가락질 소리

하늘과 땅과 내가 마주 잡았던 온기

끝내 간직하고 싶었던 것들 정면에 담지 못하고

천장 귀퉁이에 매달린 거미만 찍었지

다시 못 볼 것을 알기에 낱낱이 다 아름다웠지

집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거미는 어디로 갔을까

 

-시집 <늦게 오는 사람> 중에서

 

 


 

 

이잠 시인 / 고래불바다

 

 

들개들과 함께 바닷가 모래밭에 모로 누워

망가진 장밋빛 인생 대신 장밋빛 노을

일곱 번째 파도 앞에서 남몰래 눈물 떨어뜨릴 때

어떤 말도 이해할 수 있고 이해받을 수 있을 거 같은 기분

우리는 맨발이니까 쓸쓸하니까

꼬리 털고 일어나 방패연이나 날리는 거지

바람 타고 세상 두둥실 날아나 보는 거지

언제부터 우리는 심장에 폭탄을 품게 되었는지 몰라

말로는 다 못 해도 들을 수 있는 눈을 가졌잖아

먼 길 혼자 오는 길 어두워 멈칫거려질 때

꼬리긴뿔고둥을 불어 신호를 보내 주렴

네가 구부러진 해안선 따라 내게 오듯

나는 먼 수평선 곁눈질하며 걷다가 맞은편에서 오는 너와 만나겠지

그러다 서로를 못 알아보고 스쳐 지나간다 해도 괜찮아

밀려들든 쓸려 가든 우리는 같은 바다의 파도이니까

 

 


 

이잠 시인

1969년 충남 홍성 출생. 본명: 이성자. 단국대 국문과 졸업. 1995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해변의 개』 『늦게 오는 사람』.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포지션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