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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잠 시인 / 접사(接寫)
옛집이 무너져 내릴 때 안방에 살던 거미는 어찌 되었을까 밥을 먹다가도 자려고 누웠다가도 불쑥 생각난다 바다도 먼데 희한하게 게를 닮았던 거미 사방 무늬 천장에서 대대로 새끼 치며 살았을 털 난 짐승 다시 못 볼 사람처럼 나는 자꾸 그놈만 찍어 댔지 다시 못 볼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는데 숱한 기억들이 은거하던 마당의 넓적돌 밑 쥐며느리 굴 닳고 닳은 마룻장에서 쭈뼛거리던 녹슨 못들 벽지 안에서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던 한숨들 침묵 속에서 깜빡이던 별빛들 가장 추운 날 저녁의 경쾌한 숟가락질 소리 하늘과 땅과 내가 마주 잡았던 온기 끝내 간직하고 싶었던 것들 정면에 담지 못하고 천장 귀퉁이에 매달린 거미만 찍었지 다시 못 볼 것을 알기에 낱낱이 다 아름다웠지 집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거미는 어디로 갔을까
-시집 <늦게 오는 사람> 중에서
이잠 시인 / 고래불바다
들개들과 함께 바닷가 모래밭에 모로 누워 망가진 장밋빛 인생 대신 장밋빛 노을 일곱 번째 파도 앞에서 남몰래 눈물 떨어뜨릴 때 어떤 말도 이해할 수 있고 이해받을 수 있을 거 같은 기분 우리는 맨발이니까 쓸쓸하니까 꼬리 털고 일어나 방패연이나 날리는 거지 바람 타고 세상 두둥실 날아나 보는 거지 언제부터 우리는 심장에 폭탄을 품게 되었는지 몰라 말로는 다 못 해도 들을 수 있는 눈을 가졌잖아 먼 길 혼자 오는 길 어두워 멈칫거려질 때 꼬리긴뿔고둥을 불어 신호를 보내 주렴 네가 구부러진 해안선 따라 내게 오듯 나는 먼 수평선 곁눈질하며 걷다가 맞은편에서 오는 너와 만나겠지 그러다 서로를 못 알아보고 스쳐 지나간다 해도 괜찮아 밀려들든 쓸려 가든 우리는 같은 바다의 파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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