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순희 시인 / 이제 우리는
우리는 비 갠 날의 물흐름 소리로 만나자.
빈 밤을 지키는 자물쇠의 아픔으로 만나자.
한 빛으로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더라도 지난 흔적으로 만나자.
오래 기다린 목소리끼리 가장 따뜻한 빛으로 하나를 이루고 불신이 없는 풀의 이름으로 만나 우리는 강물처럼 흐르며 가자.
바람이 뜰을 쓸고 소리가 없는 우리의 끝없는 기다림에도 밤이 온다. 자정의 베갯머리에 무수히 쏟아지는 잠 그 잠의 끝에 피는 꿈
사랑의 말 증오의 말 온갖 말의 유희 앞에 골목을 채우는 우리의 말은 어제의 어두운 눈을 씻고 향기로운 몸살 껍질 벗은 과일과 흡사하다.
긴 터널 빠져나와 이제 우리는 지난 흔적으로 다시 만나자.
구순희 시인 / 사과나 먹자
그런데 뭘 또 우걱우걱 집어넣었더라? 멸치, 다시마, 양파 등속의 육수에 당근, 호박, 두부, 버섯, 달걀을 넣고 한 바퀴 휘휘 저어 끓였더랬다 스프도 국도 찌개도 아닌 냄비에 두 개의 숟가락이 정신없이 오간다 그렇게 배불리 점심을 먹고 현미볶음과 아몬드를 깨물다가 반건조 곶감을 아이스크림인 양 먹어도 속이 텅 빈 듯 또 땡기는 날 시작과 마무리는 만만한 게 사과라고 우리, 이러지 말고 사과나 먹자 말이 끝나자마자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낸다 그녀들의 쌍방향 웃음이 벌겋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주희 시인 / 하몬 외 1편 (0) | 2026.02.22 |
|---|---|
| 황희순 시인 / 에필로그 외 1편 (0) | 2026.02.22 |
| 리호 시인 / 건조한 악기 외 1편 (0) | 2026.02.22 |
| 김수우 시인 / 깊은 눈 외 1편 (0) | 2026.02.22 |
| 홍신선 시인 / 겨울 외 1편 (0) | 2026.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