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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라 시인 / 대명사 '그'
주말 판 「책의 향기」 행간에 굵은 밑줄이 그어진다 유리창 너머 흔들리는 밑줄처럼 바람이 지나가고 저 타블로이드판 크기의 풍경 속 한없이 '그'가 가고 있다
히말라야에 오르다 친구를 잃는다. '눈사태 속 60초'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이지만 손가락 하나 잡아 줄 수가 없다. 그 후 친구의 딸을 자신의 딸로 키워 20년이 지난 뒤 히말라야로 데려간다. 그러나 딸이 발견한 것은 발자국이 끝나는 지점 거기, 설산을 덮으며 날아가는 그림자 이제는 아버지가 아닌 다만 대명사 '그’
그 밑줄을 부여잡고 나는 국립 중앙도서관 점심 테이블에서 테이블 주어와 술어 띄어쓰기와 명사를 넘어 우동 한 그릇 국물 위에 비치는 나뭇가지와 까치를 넘어 출렁이는 하늘을 한 칸 씩 뛰어넘어 식기반납대로 간다 쑥갓 한 잎이 그 뒤를 구불터구불텅 따라가고 한 겹씩 벗겨지는 나, 빈 그릇
화장실 스위치를 올린다 선명하게 몸을 훑고 지나가는 잎새 이제는 다만 대명사 '그’
-시집 『푸른 책』(현대시시인선 22) 중에서
박유라 시인 / 언덕 위의 염소
가도 가도 그 자리 풀밭 벽에서 반야를 되새김질하는 염소들 눈조리개 몽롱히 열어 옴쭉옴쭉 방정맞게 여기서도 옴 저기서도 옴 옴을, 오물거리며
해가 가마솥 풀빵만큼 부풀어오른 정오 라디오에서는 흘러간 옛노래가 메들리로 나온다 손가락 장단을 한 번씩 퉁겨 올릴 때마다 부드럽게 흐르는 턱과 턱 능선에서 침에 섞여 노래와 풀들이 잘게 으깨지고 한나절 언덕이 잘 반죽되고 있다 부풀어 올라라 부풀어 올라라 풀 풀 풀 해가 서쪽 목책에 종잇장처럼 가볍게 걸릴 때까지 내일 아침 한 통 하얀 젖이 흘러나올 때까지
산사나무꽃은 하염없이 지고 부는 바람 하루, 이틀, 사흘,...... 내가 매일 목을 놓아먹이는 것은 무엇일까 옴,마,니,밧,메,훔,아,주,공,갈,염,소,똥,십,원,에,열,두,개,떽,떼,굴, 염소 엉덩이께에서 흘러나오는 따끈한 구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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