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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시인 / 문장의 방문
아직 아무도 방문해보지 않는 문장의 방문을 문득 받는 시인은 얼마나 외로울까 문득 차 안에서 문득 신호등을 건너다가 문득 아침 커피를 마시려 동전을 기계 속으로 밀어넣다가 문장의 방문을 받는 시인은 얼마나 황당할까?
아주 어린 시절 헤어진 연인의 뒷덜미를 짧은 골목에서 보는 것처럼 화장하는 법을 잊어버린 가난한 연인이 절임 반찬을 파는 가게 등불 밑에 서서 문득, 그 문장의 방문을 받는 시인은 얼마나 아릴까?
가는 고둥의 살을 빼어 먹다가 텅 빈 고둥 껍질 속에서 기어나오는 철근 마디로만 남은 피난민 거주지 다시 솟아오르는 폭탄을 보다가 문득, 문장의 방문을 받는 시인은 얼마나 쓰라릴까, 혹은
부드러운 바위를 베고 아이야 잘자라, 라는 노래를 하고 있던 고대 샤먼이 통곡의 거리로 들어와 부패한 영웅의 사진을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옛 노래를 잊어버린 시인이 그 문장의 방문을 받을 때 세계는 얼마나 속수무책일까?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2011
허수경 시인 /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죽임을 당하기 전에 브레멘으로 가면 뭐가 있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곳에 가면 음악대에 들어갈 수는 있다고 늙은 나귀가 말했지
브레멘이라고 들어봤어? 그곳은 어디에 있나? 그곳이 있기는 하나?
더 이상 죽음 없이 견딜 수 있는 흰 시간은 오지 못할걸 이 세계에서 빛이 가장 많은 곳에 가장 차가운 햇빛은 떨어지고 죽음보다 조금은 나은 일들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네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이 세계에는 없는 곳으로 가는 거야 나귀와 개, 고양이와 수탉이 되어 주야장천 붉은 음악에 몸을 흔들면서 없는 곳을 찾아가는 여행을 하다가
도둑의 집 그 심장 속에서 음악을 허겁지겁 집어 먹으며 물어보는거야 아니, 브레멘이라는 곳은 도대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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